하늘의 만나

담임 목사님이 직접 작성하시는 성도님들을 향한 영의 양식!

모세를 통한 출애굽의 계획 요셉을 통해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가족들은 70명의 소수인원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400년이 지나면서 20세 이상의 장정만 60만 명이 넘는 큰 민족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신분은 자유민이 아니라 노예였다. 요셉이 총리로 살아 있을 때까지는 그들은 애굽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 살았지만 요셉이 죽고 난 이후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등장하면서 졸지에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400년의 기한이 찼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어 출애굽을 계획한다. 모세는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시민권은 유대인이 아닌 애굽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모세의 양 어머니가 바로의 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인으로 키우지 않고 어머니 요게벳의 젖을 먹게 함으로써 철저히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니며 자라날 수 있도록 하였다. 유대인의 정체성이 모세에게 있다 보니 자신의 민족이 비참하게 노예로 사는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을 구원해보고자 하는 열망이 모세에게 늘 있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모세는 자신의 동족들이 애굽인에게 압제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의분에 못 이겨 애굽 사람을 돌로 쳐 죽이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모세는 애굽의 왕궁에서 도망 나와 미디안 광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미디안의 제사장 집에서 양치기 목동으로 전락하여 거기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40년을 아무런 희망도 없이 모든 것을 체념하고 하루하루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시도 모세 곁을 떠나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와 늘 함께 하였고 40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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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분인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답답하고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신앙인으로서 취하는 행동이 기도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고 침묵하실 때이다. 즉 기도하는 당사자는 하나님께서 예스(yes), 노(no)로 분명하게 응답해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이 침묵을 지키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즉시 바로 기도하는 대로 응답을 받았는가? 이것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야곱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 어머니 리브가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사랑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야곱이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빼앗아 에서의 미움을 사게 되었을 때 에서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야곱을 죽이려고까지 마음을 먹게 된 일이 있었다. 이때 야곱은 어쩔 수 없이 형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하란 땅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도망을 가게 된다. 그러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을 광야에서 묵게 되는데 자신의 신세가 얼마나 처량했는지 눈물을 흘리며 잠자리에 들게 된다(물론 성경에는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분위기를 볼 때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이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서 야곱을 지키시고 그와 동행해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현재의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암시를 넌지시 야곱에게 주시게 된다. 이에 야곱은 용기를 얻게 되고 목동으로서 양을 치는 힘든 삶의 연속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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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하신 하나님(레아와 라헬 이야기) 세상을 살다보면 공평하지 않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러나 넘치는 것이 있으면 부족한 것이 있기 마련이다. 가령 몸이 건강한 사람은 경제력이 없을 수 있고 경제력이 있는 사람은 가장 중요한 건강이 없거나 남들에게 있는 평범한 그 무엇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한 가지를 가지고 있으면 모자라는 또 한 가지가 있는 법이다.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레아는 라헬의 친 언니로서 야곱의 첫 번째 아내였다. 그런데 문제는 남편이었던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 소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레아를 불쌍히 보시고 레아에게 자식을 허락하신다. 그렇게 해서 얻은 첫 번째 아들이 ‘르우벤’이다. ‘르우벤’이라는 이름의 뜻은 “보라 아들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 만큼 레아가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한 것에 대해 한이 맺혀 지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르우벤’이라는 이름의 의미 속에는 라헬에게 아들을 낳았음을 자랑하면서 라헬을 자극하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런 의미일 것이다. “라헬아! 너는 자식을 못 낳지? 나는 아들을 낳았어. 내가 낳은 자식 한 번 볼래? 얼마나 잘생기고 예쁘게 생겼는지...”. 레아의 두 번째 자식의 이름 ‘시므온’도 마찬가지이다. ‘시므온’이라는 이름역시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충을 들으신다는 의미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아들이었던 ‘레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들을 셋씩이나 낳았으니 이제 내 남편이 내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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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함 속에 특별함이 숨어 있다(유다와 다말 이야기) 성경이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 대해 한 층 더 신빙성을 더하는 대목은 야곱의 12아들 가운데 4번째 아들이었던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에 대한 이야기 일 것이다. 창세기 37장의 이야기는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 왕 바로의 친위대장이었던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가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런데 38장의 이야기는 37장에 이어서 요셉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누가 고의적으로 중간에 삽입한 것처럼 전혀 다른 주제로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38장은 성경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다 중요하지만 특히 창세기 38장은 예수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38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야곱의 12아들 가운데 유다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엘, 오난, 셀라이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유다의 장자였던 엘이 다말과 결혼하게 되고 엘이 하나님 앞에 악하여 후손을 남기지도 못한 채 죽게 된데서 비롯된다. 이에 다말은 졸지에 과부가 되지만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라 시동생이었던 오난과 다시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오난 역시 하나님 앞에 정상적이지 못한 부부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취하시게 된다. 두 번의 결혼 생활에 실패한 다말은 유다의 마지막 아들이었던 셀라와 또 다시 결혼을 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지만 셀라가 아직 어려서 결혼을 하지 못한 채 시아버지 유다의 권유에 의해 친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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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신앙 기독교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부활의 종교이다. 2000여 년 전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이미 사라지고 존재할 수없는 종교였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대다수 순교를 당했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적으로 목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순교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했으며 나다나엘은 온 몸의 피부가 짐승의 가죽을 벗기듯이 피부가 벗겨지는 고통을 당하며 순교를 당했다.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인들도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로 순교를 당했으며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카타콤(지하묘지)에 들어가 시신이 썩는 냄새를 맡으며 신앙을 지켰다. 어떤 이는 순교를 당할 때 통감자처럼 삶아진 채 죽임을 당하거나 창살이 있는 밀대에 밀려서 죽거나 때로는 굶주린 개들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중에는 개들이 얼마나 많은 인육을 먹었는지 인육을 먹는 일에 싫증을 느꼈다고 교회사에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는가? 그들 역시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순교를 당할 때 개인의 이름으로 죽어간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으로 죽어갔던 것이다. 사형을 집행하는 로마 장관이 ‘너는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이름대신 ‘나는 기독교인입니다’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이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는데 그들의 신앙은 이 세상에서 죽고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사는 부활을 의미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인생들의 고정관념을 깨트리신 분이다. 사람이 죽으면 끝이라는 잘못된 고정관념과 죽음이후의 세계가 있음을 부활을 통해 인생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부활이후의 예수님의 몸은 이전의 육체와는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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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을 가장한 필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여러 크고 작은 일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웃기도하고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슬픈 일을 만나 울기도 한다. 그렇다면 신앙인으로서 이런 일을 만났을 때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열 한 번 째 아들이었던 요셉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있는 소년이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두 번씩이나 연거푸 꾸게 되는데 꿈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에는 같은 꿈이었다. 첫 번째 꿈은 들에서 추수할 때 형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에 와서 넙적 절하는 꿈이었다.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의 별에게 절을 하는 꿈이었다. 이렇게 같은 꿈을 두 번씩이나 연거푸 꾸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이 꾼 꿈을 확실하게 이루시겠다는 증거였다. 하나님은 요셉의 꿈을 이루시기 위해 먼저 요셉으로 하여금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하였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느 날요셉이 우연하게 자신이 꾼 꿈을 형들에게 자랑하게 되는데 그 일이 형들로 하여금 미움을 사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들의 시기와 미움이 요셉의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번째 과정이었다는데 있다. 그리고 이것을 발단으로 요셉이 우연하게 아버지 야곱의 심부름으로 세겜에서 양들을 치고 있는 형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된다. 세겜에 도착한 요셉은 그곳에서 형들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요셉은 형들이 그곳에서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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헷 족속에게 비쳐진 아브라함의 인격 사람은 살아가면서 좋든 싫든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누군가로부터 평가를 받으며 살아간다. 혹자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평가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은 그 당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의 사람이었을까? 아브라함의 이미지를 알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삶 속에 나타난 인격이 어떠했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양과 염소를 치기에 땅이 협소하여 같이 동거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되었을 때 좋은 땅을 롯에게 기꺼이 양보한 사람이었으며 가나안 연합군과 메소포타미아 연합군과의 전쟁이 발발하여 가나안연합군이 패함으로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던 롯을 구출하기 위해 318명의 군사를 이끌고 쫓아간 사람이었다. 그리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하고 자신들의 본국으로 돌아가는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을 무찌르고 롯을 구출하고야 만다. 뿐만 아니라 그 전쟁에서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을 물리치고 획득한 엄청난 금액의 전리품에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의 삶이 매사에 이렇다보니 아브라함은 그 당시 가나안 주변 여러 민족의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매장지가 없어 땅을 구하고 있었을 때 헷 족속은 기꺼이 아브라함에게 막벨라 굴을 포함한 그 주변의 밭을 무상으로 제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나쁜 이미지의 사람이었다면 은사백 세겔(노동자의 1600일치에 해당하는 금액)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땅을 무상으로 주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아브라함은 대단한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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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암몬과 모압의 출생스토리) 타락한 세상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사용되고 있는 지명이 소돔과 고모라이다. 그 만큼 소돔과 고모라는 타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은 소돔성에 두 천사가 방문했을 때 쉽게 발견된다. 롯의 집에 방문한 천사는 남자의 육체를 입고 있었는데 낯선 두 남자의 소돔 방문은 소돔성 사람들에게 깊은 호기심을 유발하였고 급기야 육체의 정욕을 참지 못한 소돔성의 남자들로 하여금 떼를 지어 롯의 집으로 몰려오게 하였다. 그러면서 롯을 향해 협박성 발언과 함께 롯의 집에 방문한 두 사람과 “상관하겠다”고 말하며 행패를 부리게 된다. 여기서 ‘상관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인데 '성적인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여기서 이 단어는 남녀간의 성적 관계가 아닌 남색이나 강간과 같은 성적 집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것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소돔성 사람들이 동성애에 깊이 만연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소돔성의 성적 타락을 또 다시 엿볼 수 있는 대목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피한 롯의 가정사를 통해서이다. 소돔성이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할 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되고 잠시 소알성으로 피해 있었던 롯과 그의 두 딸은 소알성에 머무는 것이 두려워 산으로 다시 피하게 된다. 그들이 소알성에 머무는 것을 두려워한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소알성 사람들이 두려웠거나 아니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소알성도 심판을 당할까 두려워 한 것으로 추측된다. 산으로 피신한 롯과 그의 두 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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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과 신앙 우리가 신앙을 하게 될 때 내 수준의 신앙이 아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신앙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많은 크리스챤들이 자신의 생각에 갇혀서 자신이 정해 놓은 기준에 따라 적당하게(?) 신앙을 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즉 그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신앙하겠다는 생각에 작은 교회보다는 큰 교회를 찾아가서 자신의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고 자유롭게 신앙해도 된다는 생각부터 주일만 성수하면 된다는 생각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신앙의 공통점은 오늘날 현대인들, 특히 젊은 층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신앙은 어떤 신앙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 대표적인 인물로 아브라함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호와 함께 우리에게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자 믿음의 조상으로 불려 지게 되었는가?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칭호가 주어진 것은 아브라함이 100세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데서 유래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자신에게 생명보다도 귀한 존재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차라리 아브라함에게 전 재산을 바치라고 했으면 아브라함은 한결 마음이 편안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생명을 바치라고 했어도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미련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생명보다도 귀한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기 위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모리아 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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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대 반전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왔을 때 그곳에는 이미 여러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어쩔 수없이 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야 하는 객에 불과했기에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루 하루가 힘든 삶의 연속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내 사라의 미모가 뛰어나다 보니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야만 했다. “저들이 내 아내를 빼앗아 자신들의 아내로 삼고 나를 죽이면 어떻하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자신의 고민이 현실이 된 것이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사라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너와 같이 있는 그 아리따운 여인은 누구냐?” 이에 아브라함은 살아남기 위해서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여동생이라고 속여 말한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후대하며 사라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는 절차를 밟게 된다. 이 때 하나님께서 과거에 애굽의 바로에게 개입하여 사라를 그의 손아귀에서 구출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아비멜렉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냈던 것이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아내를 아내라고 당당히 밝히지도 못하는 비굴한 행동을 두 번씩이나 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그 당대에 아브라함이 힘이 없는 약한 존재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런데 창세기 21장에 와서는 아브라함에게 반전이 찾아온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창21:22-34). 과거에는 아비멜렉이 두려워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그런 연약했던 아브라함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장면이다(창20:1-18). 오히려 창세기 21장 22절 이후에 와서는 상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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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집에서 이스마엘이 쫓겨난 이유 이삭이 젖을 뗄 나이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의 집에 큰 잔치가 열렸는데 이 때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히는 장면을 사라가 목격하게 된다. 사라가 노년에 얻은 아들이라 얼마나 귀한 아들이었겠는가? 그런 이삭을 이스마엘이 괴롭힌 것이다. 이것을 보고 참지 못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하갈을 집에서 쫓아내라고 닦달하게 된다. 아브라함은 두 여자(사라, 하갈)가 사이좋게 지내기를 원했는데 결국 문제가 크게 발생한 것이다. 이에 아브라함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의외의 답변이 주어진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사라의 말대로 집에서 당장 내 보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갈도 비록 첩이었지만 자신의 아내였고 더군다나 이스마엘 역시 엄연히 자신의 피를 받아 태어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스마엘을 집에서 쫓아내라고 했을까? 과거에 하갈이 이스마엘을 잉태함으로 교만 했을 때 사라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았던가? 다시 말해 하갈이 집에서 가출하여 광야에서 울부짖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하갈을 통해 나올 자식의 이름까지 친히 지어주시면서 이스마엘을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위로했던 분이 아니었던가?(창16:4-14). 그리고 다시 사라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그녀에게 복종하며 이스마엘이 태어나서 장성하기까지 아브라함의 집에서 불편하더라고 참고 살라고 말씀하시며 사랑을 베푸신 분인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었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스마엘을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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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의 출생이 가지는 의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그 아들이 바로 사라를 통해 태어난 이삭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이 곧 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2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성취 되었다는데 있다. 그렇다보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을 믿지 못하고 두 번에 걸쳐 하나님께 믿음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그 첫 번째는 아브라함의 집에서 종으로 있었던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그의 양자(후사)로 삼으려는 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아 결국 포기하게 된다(창15:2-5).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약해질 때가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 역시 그 때까지만 해도 완전하지 못한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계속해서 아들을 주시지 않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몸종이었던 애굽여인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주어 아들을 얻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사라가 서두르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자꾸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남자로서의 기능이 점점 상실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에 거한지 10년이 지난 시점이었는데 이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85세였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사라의 말만 듣고 하갈을 아내로 맞이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을 얻게 된다. 그로부터 13년이 흘렀을 때, 즉 이스마엘의 나이가 13세이고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가 되었을 때(사라의 나이는 89세) 뒤늦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두 천사를 대동하여 아브라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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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 이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이 땅의 전부를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그러한 약속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땅은 아브라함의 기대와는 달리 더 이상 아브라함에게 편안한 삶을 제공하거나 모든 것이 넉넉한 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땅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땅이 될 것이라는 약속은 하나님께서 해주셨지만 문제는 당장 먹을 것부터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약속의 땅으로 왔는데 그 땅에 기근이 와서 양식조차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축복해주시리라 믿고 신앙을 시작 하지만 막상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께 묻지 않고 애굽행을 결심하게 되는데 애굽을 택한 이유는 예로부터 양식이 풍부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애굽에 양식이 풍부한 이유는 적도가 발원지인 나일강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 적도에서 발원한 나일강은 세계에서 가장 긴 강으로서 농사에 필요한 각종 영양분이 될 수 있는 퇴적물을 강물을 통해 애굽까지 이동시켰고 이러한 퇴적물을 잔뜩 함유한 강물이 나일삼각주(성경지명: 고센)에서 범람함으로써 퇴적물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강물이 범람한 후에 물이 빠지면 비옥한 옥토로 탈바꿈 되었는데 애굽인들은 그곳에 들어가서 각종 씨앗을 뿌리고 농사를 지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홍수는 재앙으로 인식되지만 애굽인들에게 홍수는 신의 축복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홍수는 매년 반복되었는데 어쩌면 애굽이라는 나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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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문명의 중심지 ‘우르’와 문명의 변두리 ‘가나안’ 기원전 약 2100년 아브라함이 살았던 고향은 그 당대에 문명의 중심지이자 인류 최초의 문명이었던 수메르 문명의 중심지였다. 검은 머리카락의 소유자 수메르인들은 목축업에도 능했으며 인류사에 있어서 최초로 논에 물을 대어 농사를 짓는 관개농업도 그들에 의해 개발되었다. 또한 최초의 문자라 할 수 있는 쐐기문자도 수메르인들을 통해서 발명되었다(쐐기문자는 흙으로 만든 점토판에 ‘V’자 형태로 쐐기 자국의 모양이 생기도록 기록했기에 “쐐기문자”로 부른다). 이렇듯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아무런 불편함 없이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안락한 삶을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을 향하여 길을 떠나라고 말씀하신다. 이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향해 첫 걸음을 내디디게 된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결단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이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고대 세계에서 타 민족의 땅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이 따르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동족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고 하는 것 역시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당대에는 여행객이나 상인들이 노상에서 강도를 만나 물건을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는 일은 다반사였으며 동족을 떠나 다른 민족에게로 가서 산다는 것 역시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모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이러한 모든 위험을 무릎 쓰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한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 데라와 자신의 아내 사라, 그리고 조카 롯을 이끌고 하란 땅에 도착하여 그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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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왜 ‘의인’이고 ‘완전한 자’인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를 포함한 그의 가족 8명이 구원을 얻게 된다. 노아의 가정이 구원을 얻은 이유는 노아의 ‘의로움’에 있었다. “노아는 당대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창6:9)”. 그러나 문제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그 어떤 인생도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다고 증거 하는데 있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7:20)”.  전도서 7장20절의 말씀만 봤을 때는 성경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창세기에는 노아가 의인으로 등장하지만 전도서에는 인생들 가운데 그 어떤 인생도 의로울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인생의 의로움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것이다(시53:3, 사64:6, 롬3:10-12). 그렇다면 여기서 노아가 의롭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셨을 때의 의로움이다. 다시 말하면 노아 당대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땅위에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사랑, 정의, 공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철저히 서로가 물고 뜯는, 윤리와 도덕이 무너진 삶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만큼은 이런 악한 세상 속에서도 악에 물들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영적인 싸움을 하며 홀로 경건한 삶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아는 여호와께 특별한 은혜를 입었던 것이다(창6:8).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려고 세상을 내려다 보셨는데 많은 인생들 가운데서 노아만이 하나님의 눈 안에 들어온 것이다. 이것을 히브리 원어 개념으로 재해석 하면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눈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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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두려워했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성경을 읽다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간혹 등장한다. 그 중에 하나가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인 후 하나님께서 가인을 책망하시는 내용이 등장하면서 가인이 도망 다니며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문제는 가인이 왜 도망을 다닐 수밖에 없었느냐는 것이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바라봤을 때 그 당시의 사람이라고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 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가인은 누군가가 자신을 죽일까봐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의 이마에 표를 주시면서 가인을 해하는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곧 그 당대에 아담과 하와 외에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인이 두려워한 대상은 결코 자신의 부모였던 아담과 하와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지만 가인 외에도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전제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독자들이 여전히 아담과 하와의 첫 아들은 가인이고 둘째 아들은 아벨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즉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외에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성경저자의 의도, 즉 기록 목적을 파악하지 못한데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인물들까지 굳이 성경에 등장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건들이 성경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 4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건의 핵심은 아담과 하와의 첫째 아들이 가인이고 둘째 아들이 아벨이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기록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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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는 한 그루의 느티나무와 같다 어느 날 한 스승이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나누었다.“가시나무를 보았느냐? 예 보았습니다. 그럼 가시나무는 어떤 나무들이 있던가? 탱자나무, 찔레나무, 장미꽃, 아카시아나무 등이 있습니다. 그럼 가시달린 나무로 넓이가 한 아름되는 나무를 보았는가? 못 보았습니다. 그럴 것이다. 가시가 달린 나무는 한 아름 되게 크지 않는다. 가시가 없어야 한 아름 되는 큰 나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시가 없는 나무라야 큰 나무가 되어 집도 짓고 상량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가시 없는 큰 나무는 다용도로 쓸 수 있지만 가시 있는 나무는 쓸모가 없느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다. 가시가 없는 사람이 용도가 많은 훌륭한 지도자이며 꼭 필요한 사람이며 정말로 성현이 될 수 있는 그릇이다. 가시는 남을 찔러서 아프게 한다. 그리고 상처를 내서 피를 흘리게 한다. 입을 통해 나온 말의 가시, 손발을 통해서 나온 육신의 가시, 욕심을 통해서 나온 마음의 가시, 나무에 가시가 없어야 다용도로 널리 쓰이듯 사람도 가시가 없어야 우주를 살려내고 인류를 살려내는 성현이 되느니라. 가시 있는 나무는 쓸모가 별로 없느니라"  참으로 옳은 말이다. 우리가 제자가 되기 위해서 더 더욱 유념해야 할 말이다. 어쩌면 우리 예수님은 나무로 비유하자면 철저히 가시가 없는 한 그루의 나무였다. 누구나 가까이 하고 싶은 여름날의 큰 느티나무처럼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였다. 느티나무는 큰 죄를 범한 죄인이 와서 그늘아래에 쉬고 있다고 해도 그들을 향해 인상을 찌그리거나 불평하는 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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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하늘빛교회에 주신 사명과 비전 2014년이 어느덧 역사 속으로 흘러가고 대망의 2015년이 밝아 왔다. 2014년을 하나님 안에서 열심히 믿음으로 뿌렸기에 한 해의 열매가 있었고 그 열매를 바탕으로 2015년을 새롭게 준비하게 된 것이다. 2014년이 하늘빛교회에 있어서 한 단계 도약을 위한 준비기간 이었다면 2015년은 우리에게 도약을 허락하신 해라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 절대로 공짜가 있을 수 없다. 공짜는 하나님의 공의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2015년도 하나님께서 우리 하늘빛교회에 주신 표어는 ‘가서 제자 삼으라’ 이다. 제자를 삼는 다는 의미 속에는 먼저 내가 주님께서 마음껏 쓰실 수 있는 제자가 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내 자신이 제자가 되지 못했는데 어떻게 또 다른 사람을 제자 삼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철저히 내 자신이 먼저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내가 제자가 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극히 작은 것에서 시작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을 결코 사용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일에도 충성할 수 있다고 말씀 한다. 그래서 우리 하늘빛교회도 2015년도 표어에 근거하여 작은 것부터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5대 실천항목과 목표를 정했다. 금년도에 그것을 삶속에서 묵묵히 실천으로 옮기게 될 때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성장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어느 순간 주님의 참 제자로 성숙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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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한 해를 마무리 하며... 성탄절은 해마다 12월 25일이 되면 우리에게 어김없이 다가온다. 그리고 성탄절과 함께 사람들의 마음은 한 해를 또 보내야 하는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아마 나이가 자꾸만 들어간다는 생각과 함께 년 초에 세웠던 계획들이 작심삼일로 끝난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한 해가 저물어 가는 것이 꿈 많은 학창시절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결코 기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의 생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늘 새로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렇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늘 새로움이 있을 뿐이다. 세월 속에서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성탄절이 12월 25일 연말에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시기 위함일 것이다. 한 해가 가면 또 새로운 해가 다가오듯이 우리는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달려갈 수 있어야 한다. 미래는 언제나 우리에게 달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사람에게도, 실패의 쓰라린 경험을 한 사람에게도 똑 같이 미래는 공평하게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패를 했다 해서 좌절할 필요가 없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면 되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치고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크게 성공한 사람일수록 실패경험도 비례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만큼 그들도 남모르는 눈물과 함께 좌절을 맛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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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이 세상의 희망이다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곳은 에덴동산이었다. 거기는 배고픔이나 슬픔, 외로움이나 죽음도 없는 낙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더 이상 배고픔이 저절로 해결되는 땅이 아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아픈 몸을 이끌고도 어쩔 수 없이 출근을 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된다. 혹자는 불편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식당에서 서빙을 하기도 한다.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함에 불구하고 현실의 장벽에 부딪쳐 치료를 포기한 채 자신의 몸을 삶의 현장에 내 던진다. 어떤 이는 투잡, 쓰리잡으로 남들이 자는 시간에 자지 못하고 밤을 뜬 눈으로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결국 손에 얼마의 돈을 쥐게 된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몸을 혹사시켜서 돈으로 바꾸어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얻은 물질로 이 땅에서 진정한 행복이 주어진다면 다행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어디 이뿐인가? 서로가 무한 경쟁의 구도 속에서 살아가다 보니 때로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짓밟거나 상대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로 살아간다. 남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형제의 관계가 단절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남편이 아내이름으로, 아내가 남편의 이름으로 고액의 보험을 들어서 사고로 위장하여 보험금을 타내는 무서운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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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은 어떤 존재인가?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현재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삶의 목표와 방향이 분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님의 삶은 철저히 예수님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었다는데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단 한 번도 아들로서의 권위를 자랑하거나 하늘의 능력을 개인적인 유익이나 목적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극히 낮고 낮은 자리에 머물면서 가난한 자, 병든 자, 고아와 과부 및 소외 받고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친구가 되셨고 위로자가 되셨다. 단 한 번도 이 세상의 능력자들과 권세자들, 부자들을 향해 아첨하거나 그들의 편이 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생명까지 죄 많은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내 놓으셨다. 십자가의 형틀에서 조롱과 모진 고통을 당하시면서 운명하시는 그 순간까지 주님은 인생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측에 있는 강도까지 구원하셨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목표와 방향도 분명해진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가시는 곳곳 마다 아무런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던져주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참 된 희망과 생명을 던져 줄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가 새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도 이런 생명의 역사가 삶의 현장 속에서 날마다 나타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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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의미 2 복음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기쁜 소식이 다를 수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온 세상을 하얗게 덮는 눈은 그에게 있어서 기쁜 소식이다. 즉 복음인 것이다. 그러나 눈을 치우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기쁜 소식이 될 수 없다.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눈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제설작업이라는 고통스러운 일로 받아 들여 질뿐이다. 이처럼 똑 같은 상황 속에서 어떤 이는 기쁜 소식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슬픈 소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더 이상 복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이라는 단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한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에게 동등에게 기쁜 소식이 복음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복음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복음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들은 헬라(그리스)인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첫째로 게임에서 승리했을 때 그것이 복음이었다. 둘째는 세금인하이다. 마지막으로 장모방문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이 복음으로 받아들여졌다. 설마 ‘이것이 복음의 개념이었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헬라인들의 이러한 복음의 개념이 기독교공동체로 넘어온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게임승리, 세금인하, 장모방문 취소는 더 이상 복음의 본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기쁨을 줄지 몰라도 영원한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은 누구나에게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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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의미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 중에 우리 귀에 늘 익숙한 단어는 ‘복음’이라는 단어이다. 그런데 막상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이 무엇이냐고 묻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주저한다. 그 이유는 복음이라는 단어를 듣기는 들었지만 막상 대답을 하려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복음의 사전적 의미는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발전하면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복음의 주요 개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복음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아주 획기적이고 새로운 것을 제시한 분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운 것을 제시한 분이 아니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새로운 것을 제시한 분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율법(구약)을 완전케 하신 분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미 구약에 있었던 것을 다시 가르치시고 업그레이드 하신 분이다. 이것은 곧 예수님 당시에 이미 구약의 율법이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로 예수님 당시에는 신약성경은 없었고 오로지 구약성경뿐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철저히 구약의 가르침이었고 재해석이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도 십계명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출애굽기 20장과 레위기 19장에 근거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을 율법이라고 무시하고 신약을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 구약과 신약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동일한 복음이다. 구약은 율법, 신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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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사건은 역사적 사실인가? 오늘날 과학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미스터리한 일 들 중에 하나가 언어의 다양성이다. 지구상에는 약6000여 가지의 언어가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기원전 3세기 바벨론의 역사가 베로수스는 인간들이 신들을 경멸하고 인간이 신보다 더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 높은 탑을 쌓다가 신들이 있는 곳에서 바람이 나와서 탑이 무너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신들이 인간에게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창세기 11장은 이에 대해 시날 평지(오늘날 이라크)에 인간이 바벨탑을 쌓았는데 그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 아닌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는데 있었다고 증언한다. 결국 이러한 인간의 행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즉 언어의 혼잡으로 인해 탑 쌓기는 중단되었고 그때부터 인간은 자신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온 지면으로 흩어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성경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고고학을 통해서도 일종의 바벨탑이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신전인 ‘지구라트’가 중동지역에서 발굴되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피라미드식의 계단식 모양을 하고 있는 건축물로서 맨 꼭대기 상층부에는 메소포타미아(오늘날 중동지역)의 신들을 섬기는 제단이 있었다. 그들의 제의 의식 속에는 특별히 구별된 남녀 한 쌍이 탑의 맨 꼭대기에 있는 제단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그들과 함께 올라갔던 수행원들이 보는 앞에서 성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관에 뉘어진다. 그 후 수행원들도 독약을 마시고 그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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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의 유래 □ 성경적 근거 추수감사절은 구약성경의 초막절(레23:33-44)에서 유래한 것이다. 초막절(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한다)은 이스라엘의 3대 명절(유월절,오순절,초막절)중의 하나로 올리브, 포도농사(추수)가 끝나는 가을에 지켜졌다. 본래 초막절은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노예)살이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선지자를 애굽에 보내서 그들을 탈출시키고 그 후 40년 동안 혹독한 광야생활을 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해마다 지켰던 절기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초막절이란 7일간 광야나 밭에 나가 나뭇가지나 풀로 임시 초막을 지어 생활하면서 광야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은혜를 기억하는 가운데 신앙의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지켰던 절기(명절)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절 추수감사절은 영국 국왕 제임스 1세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고 박해를 가하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청교도 102명은 1620년 9월16일 영국의 플리머스항(港)을 출발해 메이플라워호(무게 180t, 길이 27.5m, 돛 3개를 가진 배로, 원래는 포도주를 운반하던 상선(商船)이었다)를 타고 65일간의 항해 끝에 11월 19일에 케이프코드만(灣)을 경유하여 11월 21일 오늘날의 프로빈스타운에 입항하여 선박수리와 보급(補給)을 받았다. 그 후 12월 21일 매사추세츠주(州) 연안에 도착하여 이 지역을 플리머스로 명명하고 영구 정착촌을 세우기에 이른다. 물고기 잡는 법도 농사를 짓는 법도 몰랐던 청교도개척민들은 긴 긴 겨울동안 47명이나 죽어가는 고통과 슬픔을 겪어야만 했다. 인디언 원주민의 도움이 없었다면 추위에 모두 굶어죽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원주민의 도움으로 물고기 잡는 법과 농사짓는 법을 배우고 일 년을 보내면서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여 인디언 원주민 90명을 초청하여 그들과 음식을 나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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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리원(Only one)의 하늘빛교회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종교를 일컬어 기독교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독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삼았던 유대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었고, 12제자도 모두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로마제국 전역으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한 사람도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유대교는 오늘날 이스라엘의 국교로서 자국 내에 600만 명, 그리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1200만 명 등 모두를 합치면 1800만 명 정도의 신도를 거느리고 있지만 여전히 유대인의 종교라는 좁은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았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선민사상에 빠져서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민족을 택하신 이유는 열국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었지만 그들은 편협한 민족주의에 빠져서 자신들만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열국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마저도 그들 스스로 저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다시 열국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셨으며 그 계획은 기독교라고 하는 공동체로 구체화 되었다. 그리고 그 기독교 공동체는 여러 시대를 거쳐 오면서 온 세계로 확장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살고 있었던 우리나라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선교사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장 많이 파송하는 나라로 성장하였다. 하나님은 이러한 역사의 중심에 우리 하늘빛교회를 세우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 하늘빛교회가 넘버원(number one)의 교회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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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기독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 보니 사회생활을 하면서 밥을 먹을 때도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눈을 뜬 채 마음으로 기도하고 밥을 먹는다. 그리고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해 차마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감추는 신앙인도 있다. 그나마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불행(?) 중 다행스러운 행동일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면서도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지금은 구약의 율법 시대가 아니라 신약의 복음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더 이상 행동에 제약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라는 논리로 방탕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기독교인과 불신자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주일날 성경책을 들고 교회 가는 것을 봐서는 분명 기독교인인데 일상의 삶속에서는 전혀 기독교인다운 모습이 드러나기 않기 때문이다. 즉 주일날 교회에서 열심히 헌금도 드리고 봉사도 하는데 교회 문만 열고 세상으로 나오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기독교인들이 이중적인 삶, 즉 신앙 따로 삶 따로 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목사를 통해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조선) 땅에 들어 왔을 때의 초기 기독교는 오늘날과 분명 달랐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당대 기독교는 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종교였다. 한 예로 일제시대 때 있었던 실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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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통한 구원은 행위에서의 자유를 말하는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묻게 될 때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믿음에 대한 오해가 교회 안에서 크고 작은 문제로 나타났다는데 있다. 즉 믿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다보니 삶 속에서의 행위를 무시하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행위는 더 이상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다는 생각을 갖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행위를 무시하고 믿음을 통한 구원만을 강조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행위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가?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행위를 무시하시고 믿음을 통한 구원만을 강조하셨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먼저 고민해보면서 성경 속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성경에서 믿음을 통한 구원이 강조된 곳은 여러 곳 있지만 그 중에 오늘날 기독교가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곳이 바울사도가 기록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 1장 17절에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종교개혁가 루터는 기독교의 핵심 사상이 믿음을 통한 구원이라고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에서는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음이라(갈3:11)”,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이 외에도 여러 구절이 있지만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믿음을 통한 구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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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다는 의미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매주일 또는 매일 새벽, 수요일, 금요일 저녁에 정기적인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제자훈련이나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경을 배운 만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인 가르침대로 살고 있냐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 가지만 모두가 똑같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막연히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학생과 학교를 왜 가야 하는지를 알고 공부하는 학생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똑 같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지만 목적을 상실한 학생은 더 이상 공부에 관심도 없을 뿐 더러 좋은 학업성적을 기대할 수도 없다. 반면에 목적을 알고 공부하는 학생은 그 목적이 분명하기에 어떤 어려운 난관도 극복하면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학업에 열중하여 좋은 성적을 거둔다. 그렇다고 봤을 때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를 너무나 쉽고 안일하게 생각한 나머지 무조건 교회에만 나가면 된다는 식으로 신앙을 하면 발전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설교말씀을 듣고 성경공부를 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 속에서 날마다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막연하게 하나님의 성전에서 설교말씀을 듣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성경공부를 하고 설교말씀을 듣는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은 삶속에서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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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수님을 알고 있는가?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향하여 당신은 예수님을 아느냐? 하나님을 아느냐? 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안다고 대답할 것이다. 교회를 출석한지 오래된 신앙인뿐만 아니라 이제 막 교회를 출석해서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성도에 이르기까지 그 대답은 동일할 것이다. 그리고 일상의 삶 속에서 두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만나 서로 인사하는 정도의 만남이 이루어진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즉 훗날 누군가가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해 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도 그냥 아는 것이 아닌 잘 안다고... 그러나 미국 사람들의 사고는 우리와는 좀 다르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와 똑 같은 상황을 놓고 물었을 때 그들은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국 사람들은 한두 번 만남이 이루어진 사람에 대해서는 안다고 말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들이 안다고 말할 때는 그 상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게 될 때 비로소 안다고 말을 한다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의 성격이 어떤지,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직장은 어딜 다니는지, 사는 곳은 어디인지 등등...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사람들과는 달리 너무나 쉽게 안다는 말을 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봤을 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닌 깊이 아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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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적은 누구인가? 인도의 성자로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가 젊은 시절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힌두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할 생각을 갖고 어느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참석하게 되었다. 간디는 예배를 드리고 나서 목사님을 만나 기독교인이 되는 방법과 인도의 계급사회인 카스트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조언을 듣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배실에 들어서자 남루한 옷차림의 간디를 보고 안내원이 불친절하게 영국 사람들과 차별을 하면서 한쪽 귀퉁이에 가서 앉을 것을 권했다. 간디는 안내원의 불친절에 기독교에도 신분의 구별과 상하계급이 있다면 차라리 힌두교인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목사님을 만나지도 않은 채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나는 예수님도 좋고 하나님도 좋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싫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혀 예수님을 닮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 만약 그 안내원이 간디에게 예수님 안에는 신분에 차별이 없음을 느낄 수 있도록 따듯한 사랑과 친절을 베풀었다면 깊은 감명을 받고 즉시로 기독교로 개종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안내원의 불친절이 인도를 오늘날까지 힌두교 국가로 남게 한 것이다. 간디가 기독교인으로 회심했다면 오늘날 12억이 넘는 인도는 우리 대한민국처럼 기독교가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간디가 살았을 당시에 인도 사회에서 누군가가 상대에게 “당신은 기독교인 인 것 같습니다”라는 말은 모욕적인 말로 들렸다고 한다. 반면에 “당신은 기독교적입니다”라는 말은 칭찬으로 들렸다고 한다. 얼핏 들으면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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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에 관한 오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성경 말씀에 대해 가장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한 가지 꼽으라고 한다면 믿음과 행함에 관한 오해일 것이다. 그 이유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 할 때 ‘오직 믿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루터가 주장한 ‘오직 믿음’을 통한 구원은 로마서 1장 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루터가 ‘믿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한 이유는 그 당대에 로마카톨릭(천주교)에 만연되었던 인간의 ‘행위(선행)’를 통한 구원을 배격하기 위한 근거로써 ‘믿음’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즉 행위를 통한 구원이 아닌 믿음을 통한 구원이 성경의 본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루터는 야고보서에 나타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에 반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야고보서를 복음의 핵심이 빠져 있고 아무 쓸모없는 지푸라기 서신으로 폄하하며 불에 태우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즉 루터가 봤을 때 야고보서에서 나타난 구원관은 믿음을 통한 구원이 아닌 로마 카톨릭처럼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고 있었기에 거기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의 이념과도 전면적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한때 신약성경에서 야고보서를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발언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오늘날 개신교 역사에 엄청난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루터의 실책은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은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루터는 자신의 얄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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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어 하셨던 일들은 화평케 하는 일이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사랑으로 허무는 일을 하셨다. 그렇다고 봤을 때 이러한 예수님의 일은 에덴을 회복하는 모형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그 모형은 이 땅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로 나타났다. 그래서 이 땅 가운데서 아무런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물하셨던 것이다. 즉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배고픈 자에게는 빵을 주시고 병든 자에게는 고침을 받게 해주심으로써 인간이 본래 배고프고 외롭고 병들어야 되는 존재가 아닌 하늘에 속한 영원한 존재임을 알게 해주셨다. 뿐만 아니라 죄의 종노릇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물고 뜯는 현실 속에서 인간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몸소 삶을 통해 보여주셨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예수님의 이러한 사역이 인생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신 중대한 사건이었다는 것이며 우리 인간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닮아 있어야 된 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라면 마땅히 삶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가? 불신자들의 눈에 비쳐진 우리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발견되는가? 예수님처럼 원수를 사랑할 만큼 내 속에 사랑으로 충만한가? 그러나 문제는 아직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어 삶을 통해 참 인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신 분이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모든 만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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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 죽음의 의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사건을 일컬어 십가가의 대속사건이라 부르며 온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켰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대속사건, 즉 ‘한 의로운 행동’이 어떻게 한 두 사람이 아닌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보면 쉽게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아담 한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은 범죄행위가 선악과를 보지도 못했고 먹어 보지도 못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그 죄의 영향이 미친것처럼 예수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동이 모든 사람들을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그 신분을 바꿀 수 있다는 원리가 적용된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고 했을 때 한 사람의 의인, 즉 예수그리스도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다는 원리가 여기에 적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 즉 우리와 똑 같은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면 충분한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인류 구속사에서 왜 중요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구약에 나타난 제사제도를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제사제도의 본래 취지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 세상으로 쫓겨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회복을 위해 제시된 제도이다. 즉, 죄로 인해 오염된 인간이 죄 사함을 받고 정결함을 얻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제도가 제사제도인 것이다. 제사제도에는 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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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과 우리의 과제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단 번에 파괴시키고 관계를 단절시켰다. 아담과 하와의 부부관계는 물론 형제였던 가인과 아벨의 대립은 결국 형이 동생을 죽이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그 후 인간 사회는 끊임없이 서로 반목 대립하는 관계로 추락하면서 본래 인간이 지니고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메시아를 통해 만유를 회복할 것을 약속한다(창 3:15). 그리고 그 구원의 계획은 아브라함을 부르는데서 시작되어(창 12:3) 이삭과 야곱에게 선포된다(창 18:18; 22:18; 26:4; 28:14). 이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만 한정되는 은혜가 아닌 열국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서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는 세상 열국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을 선택한 목적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닌, 이방민족까지 구원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거룩한 백성을 삼고 또한 이방민족을 하나님께로 중재하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수여한다(출 19:6). 구약에서 이방민족에 대한 구원 사례로는 요나서가 대표적인데 12만 명의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킨 사건은 ‘만민 구원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만민구원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이방을 구원하고 빛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다 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의 종교와 문화에 쉽게 동화되어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게 된 것이다(사 42:6; 49:6).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만민 구원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기대를 접지 않으며 말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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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시대는 왜 암울했는가? 사사기에는 총12명의 사사가 등장하는데 그 배후에는 한결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과 관련이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땅을 점령하고 안식을 주셨다면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이방인들이 보기에 참으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삶을 살아야 했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 나라로서 거룩한 삶을 통해 타락한 이방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책임이 있다는 것도 깨달아야만 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배가 부르고 근심걱정이 없게 되자 그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삶의 양식에 궁금증을 가졌고 결국에 가서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동경하기에 이른다. 오히려 하나님백성으로서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보다 그들의 삶에 끌려 다니는 우스운 꼴이 연출된 것이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을 섬길 때도 아주 흥미를 유발하는 방법으로 신을 섬겼다. 예를 든다면, 그들의 제의 의식 속에는 술과 춤이 빠지지 않았고 심지어는 남 녀 간에 성적인 음란한 행위까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잘못된 제의 행위를 이스라엘이 동경한 데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의 의식 속에는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흥미로운 것들이 그들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광야에서 가나안땅에 입성할 때까지만 도움을 주신 하나님으로 한정 짓고 가나안땅에서의 모든 풍요로움은 하나님이 아닌 바알이 준 것으로 이해하면서 더 이상 하나님이 그들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을 징벌하기 시작했는데 그 징벌의 도구는 다름 아닌 이방인이었다. 그들에게 압제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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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고엘 제도의 의미 고엘 제도는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가족의 결속과 유대 강화를 위해 서로 돕고 보호하는 차원에서 법적으로 만들어 놓은 제도를 말한다. 히브리어로 ‘고엘’의 뜻은 ‘되찾아오다’, ‘구속하다’, ‘원한을 갚다’, ‘보상하다’, ‘친족의 역할을 하다’의 동사적 의미와 이것을 시행하는 사람으로서 ‘구속자’, ‘속량자’ 등의 명사적 의미가 있다. 이러한 고엘 제도에 대해서 성경은 구체적으로 대략 다음과 같은 경우에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토지와 가옥에 관한 부분이다(레25:23-25; 29-34). 이것은 어떤 사람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땅이나 가옥을 판 것을 가까운 친족이 ‘고엘’이 되어 땅이나 가옥을 산 자에게 값을 대신 치루고 가족(친척)의 재산을 되찾아 회복시켜 주는 경우에 해당된다. 둘째는 종으로 팔린 경우이다(레25:47-49). 이것은 자신의 친족이 가난하여 종으로 팔렸을 경우 그 사람의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 값을 치름으로써 자유롭게 해주는 경우가 해당된다. 셋째는 피의 복수자(민35:16-19)에 관한 것이다. 가족(친척) 중 한 사람이 만약 누군가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을 경우 가까운 가족(친척)이 피의 복수자가 되어 살해한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넷째는 속전에 대한 수납 권리자(민5:6-8)에 관한 것이다. 누군가가 남에게 잘못을 범했는데 그 당사자가 죽음으로써 보상받을 사람이 없을 경우 그의 친척이 대신 가해자로부터 속전을 수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계대 결혼법(신25:5-10)에 관한 것이다. 만약 형제가 자식을 낳지 않고 죽었을 경우 가장 가까운 가족(친척) 순서에 의해서 죽은 형제의 미망인과 계대결혼을 함으로써 그 형제의 가문이 대가 끊어지지 않고 후손을 남기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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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년 제도와 희년 제도의 의미(레25:1-34) 안식일이 7일마다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안식년도 7년마다 정기적으로 돌아온다. 안식년은 면제년이라는 명칭으로도 사용되는데 빚이 탕감되고 노역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해를 가리킨다. 즉 안식년 제도는 일차적으로 경제적인 약자들을 보호하고 구제하기 위한 목적과 이차적으로는 땅을 쉬게 함으로써 지력을 높여 이듬해 소출을 늘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되어 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안식년에는 빚이 탕감되고 종으로 팔려간 사람들이 자유의 몸으로 회복된다. 그리고 안식년에 저절로 맺어진 열매와 곡식은 주로 종, 품꾼, 나그네, 가축 그리고 들짐승들이 먹도록 되어 있다.  희년법은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경제 및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제도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안식일 및 안식년 제도의 정신을 확대한 것이다. 고대근동의 사회에 있어서 토지의 소유는 부의 상징이었는데 지배계층의 토지 소유는 경제 사회적 불평등과 불안의 요인이 되었다. 희년법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모두가 잘 사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염원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공동체 중에서는 가난한 자가 없이 모두가 평등한 가운데 계약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꿈과 이상일 뿐 현실의 사회에서는 가난한 자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점을 최소화하고 그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서 희년법이 도입되었다. 토지와 주택, 노예로서의 삶은 희년이 되면 자동으로 원상 복구되었다.  이상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안식년 제도와 희년 제도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마땅히 어느 한 사람도 소외계층이 있어서는 안 되며 그 누구도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고통가운데 살아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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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복수법과 십계명 제정의 의미 2.(출21:12-25) 동해복수법은 상황에 따라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신체에 대한 상해 대신에 금전적 배상을 요구할 경우 금전으로도 대치될 수 있다는 것도 발견 된다(출 21:18-19; 29-30). 그렇다면 레위기 안에서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동해 복수법(레24:18-21)과 원수를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레 19:18)은 어떻게 서로 공존될 수 있으며 또한 접목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동해 복수법은 원수사랑, 이웃사랑과 전혀 대치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둘은 서로 보완관계에 있다. 원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실천을 독려하는 권면의 성격이 강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명령형과 권면형으로 나눌 수 있다. 명령형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어길 경우 반드시 처벌이 뒤따른다. 반면 권면형은 개인이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처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은 하나님의 권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동해 복수법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법이기에 적법한 절차에 따라 시행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것은 동해복수법이 본래 하나님이 추구했던 법의 취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동해 복수법을 이스라엘 공동체에 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악인으로부터 이스라엘 공동체를 보호하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현재보다 더욱 번성케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사회, 집단이나 할 것 없이 악인은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동해 복수법을 이스라엘 공동체의 법으로 제정함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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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복수법과 십계명 제정의 의미 1.(출21:12-25) 이스라엘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한 법으로 동해복수법과 십계명이 있다. 동해복수법이란 상대로부터 어떤 피해를 입게 되었을 때 가까운 가족이나 친적이 거기에 상응하는 복수를 할 수 있게 법적으로 보장된 법을 말한다. 예를 든다면, 나의 가족 중 누군가가 제 삼자로부터 폭행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한 경우 그의 가족들이 피해를 입은 만큼 가해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도록 법 규정이 마련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동해 복수법과 십계명을 범한 자에 대한 처벌 규정은 이러한 목적 달성을 훼방하는 세력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도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동해 복수법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없었다면 이스라엘 공동체는 몇 몇 악인의 세력들에 의해서 악이 공동체내에 전염되어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며 결국은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몰락할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공동체에 있어서 동해 복수법은 철저히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 악이 전염되지 않도록 사전에 철저히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성취케 하는 통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형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죄목은 이방의 신이었던 몰렉에게 제사 한자(레20:1-5), 신접자․박수 추종자(레20:6; 27), 부모를 저주하는 자(레20:9), 간음자(레20:9-16), 3계명을 범한 자(레24:10-16), 살인자(레24:17; 21b)가 있다. 특히 살인 행위는 모든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살인자에 대한 사형법은 언약 공동체의 사회질서를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된다.  동해 복수법은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무서운 법이지만 이스라엘 공동체를 보호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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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각종 규례를 주신 이유(출24:12-25:9) 시내산에서 율법과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인 제사제도와 같은 각종 규례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여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과 상황은 이스라엘이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애굽의 문화에 쉽게 물들고 노예근성에 찌들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이러한 모습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을 통해서도 쉽게 발견된다(출 32:4-35).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허락하기 전에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과 규례를 제정하여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앞으로 새롭게 정착할 가나안 땅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미 거주하고 있었고 거기에는 각종 우상과 음란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들로 가득하여 죄가 흘러넘치는 땅이었다(레 18:24-25).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보호하고 울타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각종 율법의 규례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십계명을 비롯한 각종 규례가 시내산에서 미리 그들에게 수여되지 않고 광야 40년의 연단과정도 없이 곧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아마도 이스라엘은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쉽게 동화되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렸을 것이다.  이것은 곧 출애굽의 목적 자체가 무의하게 되는 사건으로써 결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이 성취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한 것은 한 민족의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사장 나라 삼아서 온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복 주시기 위한 계획이 무너져 내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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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를 통해 살펴본 하나님의 섭리(출2:11-3:14)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섭리를 바라보면 인간의 생각과는 정 반대의 경우가 많다. 모세의 경우 애굽의 왕자 신분으로 궁정에 있을 때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르셨다면 더 효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킬 수 있었을 텐데 하나님은 그러한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정반대로 애굽의 왕궁에서 쫓겨나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의 신분으로서 40년을 보낸 후 열정도 식어지고 정치적인 배경도 없는 80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에게 나타나 사명을 주신 것을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논리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쳐진다. 왜냐하면 사명이라는 것은 열정이 남아 있을 때 주어지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모세를 부르실 때 정 반대의 논리로 접근하셨다. 모세는 40세가 되는 때 자신의 민족이 노예로 압제 당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힘으로 구원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때에 잠잠하셨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조금만 지원해주시고 밀어주셨다면 모세는 애굽의 왕 바로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으로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셨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약한 자를 통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고, 지혜 없는 자를 통해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에 한계가 없음을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함이라 할 수 있다(고전1:26-31). 만약 모세가 인간의 논리대로 애굽의 왕궁에 있을 때 정치적인 배경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했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한 것이 아닌 모세의 힘으로 구원한 것이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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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에 대한 이해(창39:1-23)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바로의 경호대장이었던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다른 노예들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보통 노예라고 할 때 노예들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평생을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즉 고대 사회에 노예는 하나의 물건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인격도 존중되지 않았고 그들의 목숨 역시 주인의 손에 달려 있는 짐승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그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믿고 어느 자리에 있든지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보니 보디발의 눈에 비친 요셉은 더 이상 노예의 모습이 아니었다. 다른 노예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요셉은 노예의 사고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매사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으로 보디발의 눈에 비쳐진 것이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요셉은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태생에 대해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보디발의 귀에까지 그 정보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요셉은 노예였지만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자연스럽게 주위의 사람들에게 알리며 감동을 준 것이다. 그 결과 보디발은 요셉이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차츰 인식하기에 이른다(창39:3). 그리고 여호와라고 하는 신이 정말 멋있는 분이라는 사실도 요셉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요셉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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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추절의 의미(민28:26-31) <<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3대 절기(명절)로서 유월절(봄 절기/ 무교절이라고도 함), 맥추절(여름절기/ 칠칠절, 오순절이라고도 함), 초막절(가을절기/ 수장절이라고도 함)이 등장한다. 이 세 절기에 해당되는 기간에는 모두 추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공통점이라면 첫 수확물을 하나님께 바치며 감사예배를 드린데 있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아열대성 기후로서 건기(5∼9월)와 우기(10월∼4월)철로 나뉘어진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곡식을 심을 때 반드시 10-11월경에 이른 비가 내려야만 씨를 뿌릴 수 있는 기후특성을 가지고 있다. 면적은 남한의 1/3밖에 되지 않지만 땅 모양이 오이처럼 남북으로 길죽하게 되어 있어 북쪽 헐몬산의 경우 연간 강수량이 1500미리가 넘지만 남쪽 여리고의 경우 100미리가 채 되지도 않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지형과 기후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에 만약 이 시기(10-11월)에 이른 비가 내리지 않으면 밭이 건조하여 씨앗을 뿌릴 수 없어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제 때에 이른 비가 내렸다 하더라도 우기 철에 많은 비가 오지 않으면 곡식이 자랄 수 없어 또한 농사를 망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월경 또 한 번 추수를 앞둔 시점에 늦은 비가 적당히 내려야만 결실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그들에게 있어서 비는 생명을 의미했고 그 해에 비가 많이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으로 여겨졌다. 반면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내린 저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맥추절은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감사한 절기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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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인도받은 사람: 야곱(창28:10-33:20)< 야곱을 야곱 되게 했던 사람은 에서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에서의 핍박이 없었다면 더 이상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호칭을 얻지 못했고 이스라엘의 12지파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만들기 위해서 에서에게 악역을 맡겨 야곱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에서 도망가게 하였고 그 일이 결국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때 우리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을 가져야 한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숨겨진 섭리가 무엇인지 깨닫도록 하자. 아버지 이삭의 집에서 도망 나온 지 20년 만에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객지에서의 20년 생활은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양치는 목동으로서 추위와 더위를 무릎 쓰면서 20년 동안 고생했지만 자신의 경제적인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이러한 삶을 그냥 지켜만 보신 것이 아니라 20년의 기한이 찼을 때 기적적인 방법을 통해 야곱의 재산을 순식간에 늘어나게 하셨다(창30:25-43). 야곱에게 이러한 복이 함께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자.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도 야곱에게는 순탄하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야곱에게는 풀리지 않은 숙제가 있었다. 그것은 20년 전에 헤어진 형 에서와의 불편한 관계가 문제였다. 그래서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천사를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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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사기꾼이고 속인자인가?(창27:1-46) 오늘날 야곱에 대해서는 저마다 평가가 다양하다. 그러다 보니 왜곡된 것도 많다. 야곱이 속여서 장자권을 빼앗았다고 말하며 야곱을 사기꾼이나 도둑으로 내 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야곱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 볼 수 없다. 야곱이라는 본래 이름의 뜻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는데서 유래했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창25:26). 그렇기 때문에 ‘속이는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해석은 후대로 오면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한 단어에 여러 의미의 뜻이 담겨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야곱은 정당한 방법으로 장자권을 형으로부터 팥죽 한 그릇에 샀다는데 의미를 두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로서의 권리는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야곱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야곱이 아버지로부터 축복권을 받게 될 때 에서로 위장한 것을 아버지를 속인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행위 자체로 놓고 보면 아버지를 속인 것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행위는 정당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적인 장자권은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있었기 때문에 야곱이 축복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아버지를 속인사람은 에서라고 볼 수 있다. 에서는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축복을 하려고 할 때 자신이 그것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에서가 정직한 사람이었다면 아버지 이삭에게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솔직히 털어 놓고 이제부터 이 집안의 장자는 자신이 아닌 야곱이라고 말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에서는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장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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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아브라함 이해 (창13:1-18) << 아브라함을 포함한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는 것이며 높은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또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지극히 나약한 인간적인 모습도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극한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땅 문제로 롯과의 갈등이 싹트기 시작할 무렵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택하여 아브라함으로부터 분가할 것을 제안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그 당시 아브라함의 이러한 제안은 어떻게 보면 가장 어리석은 제안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당시 좋은 땅을 선택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일뿐만아니라 자신의 부와 힘(권력) 그리고 명예를 만들어 줄 수 있는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향이었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올 때부터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기까지 조카 롯을 늘 보살펴 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는 땅을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도 조카인 롯보다는 먼저 우선권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땅의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먼저 양보하는 미덕을 발휘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행동을 오늘날의 이야기로 각색해보면 서울의 강남땅과 지방의 어느 시골 땅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할지를 놓고 롯에게 먼저 그 선택권을 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롯은 계산적인 사람이라 아브라함의 제의에 단 한 번의 거부의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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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악과를 금하신 이유(창2:15-17, 22-24) < 본문의 말씀을 읽다보면 인간의 논리로 잘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을 처음부터 원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이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악과를 먹는 순간 사망이 인간세계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인간마다 선과 악의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몇 해 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강호순이라는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의 기준은 여성들을 성폭행하고 살인을 해도 괜찮다는 것이 선의 기준이었습니다(물론 이러한 행동은 선이 될 수 없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행동이 곧 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해 전에 부유한 여성들만 골라서 금품을 갈취하고 살인을 한 후 인육을 먹었던 연쇄살인집단에게 있어서 선의 기준도 부자들의 돈은 빼앗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선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평범한 일반인들도 예외는 될 수 없습니다. 한 예로 식당에서 여럿이 똑 같은 메뉴의 음식을 먹을 때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한쪽 부류의 사람은 이 식당의 음식이 맛있다는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맛이 없다고 평가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옳고 누가 틀린 것일까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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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지창조의 신비(창1:1-5) <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말씀을 통한 무에서 유의 창조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논리나 과학의 논리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적 검증도 불가합니다. 그러나 천재적인 물리학자 스티븐호킹은 한 때 자신의 저서 「시간의 역사」(1988년, 9백만부 이상 팔림, 영국에서 4년 연속 베스트셀러)에서 우주의 기원은 오늘날 과학의 어떤 논리를 동원해도 해명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이기에 우주의 기원은 종교적인 현상으로 밖에는 이해될 수 없다고 밝힌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우주는 우연히 창조되었다고 말함으로써 많은 무신론자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만약 스티븐 호킹의 말대로 우주가 우연히 기원되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과학적인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하나 스티븐호킹은 거기에 대한 분명한 논리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킹의 말은 과학자로서의 말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가운데 한 개인의 견해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호킹의 말이 과학계에서 설득을 얻으려면 분명한 과학적인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물리학계에서는 과학의 어떤 논리로도 무에서 유로의 창조는 불과하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빅뱅이론은 과학계에서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대다수의 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빅뱅이 약 120-150억 년 전에 어떻게 우연히 일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수께기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에 말에 의하면 무에서 유의 창조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학에서 말하는 빅뱅(대폭발)이 우주의 기원이라고 가정을 하더라도 그 빅뱅이 일어나도록 힘(에너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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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아브라함을 포함한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며 높은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삶을 또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지극히 나약한 인간적인 모습도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극한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며 높은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경우 땅 문제로 롯과의 갈등이 싹트기 시작할 무렵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택하여 아브라함으로부터 분가할 것을 제안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그 당시 아브라함의 이러한 제안은 어떻게 보면 가장 어리석은 제안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당시 좋은 땅을 선택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일뿐만아니라 자신의 부와 힘(권력) 그리고 명예를 만들어 줄 수 있는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향이었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올 때부터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기까지 조카 롯을 늘 보살펴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는 땅을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도 조카인 롯보다는 먼저 우선권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땅의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먼저 양보하는 미덕을 발휘합니다. 롯은 계산적인 사람이라 아브라함의 제의에 단 한 번의 거부의사도 표시하지 않고 물이 많고 풀이 무성한 요단강 주변의 땅을 선택하게 됩니다. 롯의 입장에서 보면 그곳은 양을 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땅이었기에 결코 쉽게 뿌리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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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됨을 이루는 신앙(삿12:1-7) < 기드온, 삼손, 입다 등이 활동했던 사사시대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삿21:25).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세운 선지자나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몸처럼 움직이는 존재였지만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후에는 차츰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면서 나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조차 버리게 되는 현실에 처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저히 말씀을 떠나게 되고 바알과 같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사사 입다 장군이 암몬족속을 물리친 후 에브라임지파 사람들과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 장면입니다. 그 이전의 상황을 살펴보면 입다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으로 암몬족속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쟁이 끝나고 에브라임지파 사람들로 하여금 입다가 무시를 당하고 에브라임 사람들이 걸어온 시비에 휘말리게 된 데에 있습니다. 입다가 자기의 동족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에게 격분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말도 되지 않는 말로 시비를 걸어온 것과 입다와 길르앗 주민에 대한 모멸감을 주는 언어를 구사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입다는 길르앗 주민들을 모아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과 전쟁을 선포하게 되고 그 전쟁에서 에브라임지파 사람들이 4만 2천명이나 죽게 됩니다. 결국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를 하지만 이 사건에서 안타까운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동족 간에 전쟁을 치렀다는 것이며 입다 한 사람이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 결과가 전쟁으로 발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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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희망이다 세계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을 한 가지 꼽으라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에 대한 사건일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죽음이 모든 인생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이며 정복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 땅의 인생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지금까지 죽음을 정복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간 혹 죽은 자가 살아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지만(엘리야 선지자가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나 사도바울이 유두고를 살린 이야기 등) 그들은 얼마 후에 다시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정복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건이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언젠가는 정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각종 질병이 오늘날에 와서 의학의 발달로 지속적으로 정복되어 왔던 것처럼 죽음도 언젠가는 정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던져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인간의 이러한 희망은 꿈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앞에 실현되기에 이른다. 이에 앞서 특히 나사로가 죽었다가 4일 만에 다시 살아난 이야기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트리는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동굴로 된 무덤 속에 나사로의 시신을 안치한지 나흘의 시간이 경과하고 있는 시점이라면 시신은 벌써 부패하기 시작 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죽음은 얼마든지 정복될 수 있다는 것을 십자가 대속의 사역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인생들에게 보여준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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