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만나

담임 목사님이 직접 작성하시는 성도님들을 향한 영의 양식!

2021년, 예수님의 마음으로...

2021,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뒷받침 하듯 성경 곳곳에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천년 전 예수님의 제자였던 빌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께서 평소에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정말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하시며 예수님의 모습이 곧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의외의 대답을 해 주십니다.

빌립과 예수님이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 속에는 그 당대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모습이 곧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획기적인 진리가 담겨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러한 대화가 서로 오고 가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추상적인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은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지만 우리와의 차이점은 동시에 하나님의 신성을 그대로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성과 권위를 가지고 인간들에게 뽐내거나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의 외침처럼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졌다는 것이 가장 옳은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태어난 곳도 마굿간이었고 자라나신 고향마을도 그 당대 많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지역으로 여겼던 갈릴리 마을 나사렛이었습니다. 갈릴리 주변의 많은 도시와 마을들은 로마를 대항하여 늘 폭동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기에 기득권을 가진 유대인들에게는 늘 골치 아픈 지역으로 여겨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직업 역시 아버지 요셉의 뒤를 이어 목수였습니다. 아버지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예수님은 가장으로서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의 생계까지 떠안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능력을 사사로이 끌어다가 사용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만 사용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드러내는 일은 언제나 사랑을 통해서만 드러났고 그 사랑을 통해서 끊임없이 많은 영혼들이 살아났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역시 2021년을 맞이하여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다시 한 번 새롭게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전상후 담임목사 전상후 담임목사 · 2021-02-28 00:06 · 조회 14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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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에서 희망을 건진 사람, 야이로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을 통해 하늘의 참된 위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약자들의 배고픔과 환자들의 모든 질병들이 예수님께로만 나아가면 단 번에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 야이로는 다급히 예수님을 찾아와 자신의 집으로 가서 딸을 고쳐줄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에 그 소식을 접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게 되는데 하필 그 때 한 여인의 얘기치 않은 등장으로 변수가 생기면서 길에서 시간을 허비하게 됩니다. 그 여인은 바로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고 있었던 여인인데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그곳에서 고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일로 인해 예수님은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그 여인과 대화를 나누며 그곳에서 시간을 지체하게 됩니다. 그런데 야이로 입장에서는 딸이 죽어가고 있었기에 한 시가 급한 상황이라는데 있습니다. 어쩌면 야이로는 그 여인 때문에 자신의 딸이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딸의 죽음을 알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야이로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가는 일에 끝까지 포기 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야이로의 이러한 행동에 침묵하고 있지만 우리는 앞뒤 문맥을 통해서 야이로가 예수님을 포기하고 있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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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보암의 죄통일왕국의 왕이었던 솔로몬이 죽고 나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나뉘게 되었을 때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등극한 사람이 여로보암입니다. 그는 한 때 솔로몬의 충직한 신하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장수였는데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솔로몬의 뒤를 이어 강압정치를 펼치는 바람에 쿠데타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10개 지파의 여론에 떠밀려 자의반 타의반으로 왕이 되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솔로몬의 타락에 따른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이전 까지만 해도 하나님은 다윗의 가문을 기쁘게 여겨 다윗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따라 살아간다면 그 왕위가 끊어지지 않고 영원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타락으로 더 이상 다윗의 가문은 통일왕국을 이끌어갈 재목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0개 지파를 다윗의 가문에서 떼어내어 여로보암에게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에게 했던 동일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데 있다는 것을 여로보암에게 주지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게 되면서 자신의 백성들이 남왕국 유다의 르호보암에게로 민심이 돌아설까 두려워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자신의 백성들이 남왕국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제사를 드리러 가지 못하도록 할 방법을 고안해 내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벧엘과 단에 또 다른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금송아지를 섬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남왕국에 있는 예루살렘 외에 또 다른 예배처소가 있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명령과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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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관심사솔로몬이 지혜의 왕으로서 인생들 가운데 전무후무하게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며 태평성대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서 성경은 그가 일천번제를 하나님께 드린 후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을 구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솔로몬이 그 당시 고대근동의 왕들이 자신이 믿고 있는 신들에게 구했던 부와 명예, 건강, 원수를 대적할 수 있는 국방력을 구한 것이 아니라 ‘듣는 마음’을 구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듣는 마음(지혜)’을 구한 출발점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고대 근동의 왕들의 관심사와는 달리 평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통치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백성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모두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게 할지 늘 깊은 고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꿈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구하라고 했을 때 주저 없이 백성들을 잘 통치 할 수 있는 ‘듣는 마음’을 구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듣는 마음’은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들은 바의 말씀에 근거해서 백성들의 소리를 경청해서 듣는 마음이라 하겠습니다.마치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서 그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마음의 상처까지 고쳐 주셨던 것처럼 솔로몬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처럼 사람에게 집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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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뒷받침 하듯 성경 곳곳에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천년 전 예수님의 제자였던 빌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께서 평소에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정말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하시며 예수님의 모습이 곧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의외의 대답을 해 주십니다. 빌립과 예수님이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 속에는 그 당대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모습이 곧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획기적인 진리가 담겨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러한 대화가 서로 오고 가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추상적인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은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지만 우리와의 차이점은 동시에 하나님의 신성을 그대로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성과 권위를 가지고 인간들에게 뽐내거나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사도 바울의 외침처럼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졌다는 것이 가장 옳은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태어난 곳도 마굿간이었고 자라나신 고향마을도 그 당대 많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지역으로 여겼던 갈릴리 마을 나사렛이었습니다. 갈릴리 주변의 많은 도시와 마을들은 로마를 대항하여 늘 폭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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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하늘빛 공동체가 나아갈 길어떤 일이든지 세우기는 힘들어도 무너뜨리는 일은 너무나 쉽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세워지는 것도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의 땀방울과 많은 비용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성을 들여서 건축해 놓은 집도 허무는 데는 순식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비단 건물에 대한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제 2020년을 역사 속으로 흘러 보내고 새로운 2021년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날 들을 돌아보면 우리 하늘빛교회에서는 많은 이들이 우리와 함께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떠났습니다. 심지어는 서로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어느 날 홀연히 떠난 분들도 많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떠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왜 떠났는지를 새해를 맞이하면서 한번쯤 깊이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떠나감에 있어서 내 자신이 부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는지 하나님 안에서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그들에게 주었는지에 대한 여부도 포함될 것입니다. 작은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지름길은 담임목사의 설교와 인품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구성원들이 사랑으로 하나 된 모습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초대교회가 든든히 세워질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 온 성도들의 하나 된 마음에서 찾고 있습니다(행2:44-47). 그리고 그러한 일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다비다와 바나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다름 아닌, 많은 사람들을 세울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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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캐리, 천국의 법을 따라 살아간 사람기독교에 수많은 선교사들 가운데 대표적인 선교사로 ‘현대 선교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림엄 캐리(1761-1834)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구두수선공이었지만 독실한 침례교인 이었던 그는 성경을 읽으며 해외 선교의 꿈을 키우게 됩니다.그는 자신의 책상 위에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는 표어를 적어놓고 해외 선교에 대한 꿈을 늘 잃지 않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 당시 영국의 많은 교회들은 해외 선교를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가 백인들의 종교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더 더욱 해외 민족들은 영국인들에게 있어서 멸망 받을 이방인들로 예정된 사람들에 불과했기에 해외 선교가 인간적인 노력의 산물로 밖에는 비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캐리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꿈에 확신을 가졌으며 목회자가 된 후에는 아내와 동료들을 설득하여 1793년 인도의 캘커타로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원대한 이상과는 달리 7년간 온 힘을 다해 사역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명되지 않는 회심자 밖에 얻지 못하게 되고 사랑하는 아내와 5살 된 딸마저 건강악화로 하나님 품으로 떠나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려움을 극복한 윌리엄 캐리는 마침내 수많은 회심자들을 얻게 되었고 1819년에는 인도 최초로 서구식 대학인 세람포르 대학을 설립하고 성경을 40개 이상의 인도 토착어로 번역하게 됩니다. 또한 넓은 토지를 방치하고 있는 인도인들에게 농업지식을 전수하였으며 고리대금업자들과 싸우기 위해 저리의 저축은행도 설립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 최초의 신문을 발간하여 언론의 중요성을 인도인들에게 인식시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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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의 본래 의미 찾기(씨 부리는 비유 / 마13:1-9)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실 때 비유의 말씀으로 선포하실 때가 많았다. 달란트 비유, 열 처녀 비유, 진주장사 비유, 가라지 비유 등 복음서 전반에 걸쳐 다양한 비유들이 등장하는데 씨 뿌리는 비유도 그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논리로써 비유의 의미에 대해 해석을 시도해 왔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목회현장에서는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어 말씀이 선포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한 말씀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추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 비유의 말씀은 옥토 밭의 중요성이 크게 두각 될 것이기에 그 메시지도 심령의 옥토 밭에 맞춘 방향으로 말씀이 선포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관점이 아닌 예수님 당시에 이 비유의 말씀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의미가 직접적으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씀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계시지만 예수님이 살고 있었던 삶의 자리(현장)에서 이 말씀을 바라본다면 좀 더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의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동네에서 자라나셨고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지만 큰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막6:5-6).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대적 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으며(막3:6) 제자들 가운데는 이탈자도 생겨나기 시작했다(요6:60). 이것은 마치 농부가 정성스럽게 뿌린 씨앗들이 길가에, 돌 위에, 가시덤불에 뿌려져 무의로 돌아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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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3장을 통해서 바라본 인생 시간표학교에 가면 1교시부터 수업을 마치는 시간까지 정해진 과목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진행한다. 수업 시간표에는 국어, 영어, 수학, 미술, 음악, 국사, 체육 등 다양한 과목들이 들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아이들마다 좋아 하는 과목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아이들은 영어와 수학을 싫어하고 활동적인 체육을 좋아하는 반면 어떤 아이들은 반대로 체육을 싫어하고 영어와 수학을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취향에 상관없이 수업은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좋든 싫든 정해진 수업시간은 다가오기 마련이고 그 시간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곧 지나가기 마련이다. 아무리 괴로운 영어, 수학시간도 조금만 참고 견디면 재미있는 체육시간이 기다리고 있기에 괴로운 시간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 역시 학교 수업시간표처럼 인생 시간표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현재 어떤 이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음악시간을 맞이하여 마음껏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마음으로 수업에 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수학시간을 맞이하여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수업시간도 싫어하는 수업시간도 다 지나간다는 사실이다.그래서 성경은 전도서 3장을 통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인생시간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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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요나단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한 사람 또는 몇 몇의 소수 사람들을 통해서 전개되어 온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쉽게 발견합니다.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때 블레셋이 철기문명의 발달로 날카로운 칼과 창을 군대에 보급했을 때 이스라엘은 아직 그러한 문명을 접하지 못했기에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 외에는 철로 된 칼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암울한 시기에 블레셋이 이스라엘로 쳐들어왔다는 데 있습니다. 블레셋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기 이전만 해도 12지파 간에 서로 잘 연합이 되지 않아 사분오열상태로 블레셋에 전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지만 사울이 왕으로 등극한 이후에는 차츰 나라다운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국력이 더 나아지기 전에 아직 새싹 상태의 이스라엘을 꺾고자 했던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이스라엘의 상황은 바람 앞에 놓인 촛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암울한 현실을 반전시킨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바로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이었습니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자신의 부하 한 사람만 데리고 적진에 침입하여 적을 혼란에 빠트리고 순식간에 전세를 뒤집게 됩니다. 그가 적진에 뛰어들 때 한 말은 오늘 우리에게 늘 감동과 도전을 줍니다.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14:6)”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요나단의 용기에 결코 침묵할 수 없어 이 전쟁에 친히 개입하셨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은 이스라엘을 대항해 사기충천했던 블레셋 군대로 하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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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아들 바나바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부흥의 발판을 마련함에 있어서 한 알의 밀알이 된 대표적인 한 사람을 꼽으라고 했을 때 바나바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인데 (행4:36) 그 당시 예루살렘 교인들과 오늘날 우리에게는 요셉이라는 이름보다는 ‘바나바’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바나바’라는 이름에서 쉽게 발견되는데 그 뜻이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위로의 아들” 로 불린 이유에 대해 성경에서는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입니다. 그 당시 바나바는 교회가 처한 어려운 상황을 수동적인 자세로 남의 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일로 여기며 교회의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선뜻 자기의 큰 밭(행4:37, 헬라어 ‘아그로스’는 큰 밭을 의미)을 팔아 사도들에게 갖다 바침으로써 초대교회가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더 나아가 바나바의 이러한 헌신은 그 당시 성도들로 하여금 깊은 감명을 주어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재산을 교회공동체에 내놓는 일에 바나바가 한 바가지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는데 있습니다(행4:32-35).두 번째는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안디옥교회가 큰 부흥을 이루는데 있어서 바나바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사도바울이 세 번에 걸쳐 선교여행을 다니며 위대한 사도 바울로 성장 할 수 있도록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소개한 사람역시 바나바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바울은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다메섹도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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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 후 40일의 의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르셨다. 40일 동안 머무르시며 하셨던 일들은 공생애 기간 때처럼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시고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닌 제자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일에 집중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3년 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것을 다시 일깨우며 총 복습의 시간을 가지신 것이다. 마치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친 것을 수업을 마치는 시간 즈음에 중요한 부분을 다시 나열하며 총 복습의 시간을 갖는 것처럼 예수님도 40일간의 기간 동안 제자들과 그러한 시간을 가지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속 머물 수 있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일들은 이제 제자들에게 위임되어 제자들이 그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십자가 대속사건 이전의 몸과 부활 후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시며 신비한 하늘의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셨다. 예수님의 몸은 분명 그들이 보기에도 신비한 몸이었다. 문을 굳게 닫고 있는데도 출입문을 통하지 않고 그들에게 찾아오시어 함께 음식을 드시며 대화를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었던 못 자국이 있었고 허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신비한 몸을 보면서 이 땅에 대한 소망을 갖기보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40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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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개관 신명기는 육적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마치고 모압 평지에 도착하여 여호수아를 통해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에 모세가 남긴 일종의 유언장이라 할 수 있다.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 가나안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는 못하고 신명기라는 유언장을 남기고 죽는다. 그리고 바통이 여호수아에게 넘겨진다. 그러므로 신명기는 모세가 죽기직전에 선포한 마지막 말씀이다. 그런데 신명기에 기록된 십계명을 비롯한 기타 여러 말씀을 들었던 대상은 출애굽 1세대가 아닌 2세대이다. 그 이유는 애굽에서 나올 때 20세 이상은 광야40년 여정 속에서 여호수아 갈렙 외에는 다 죽고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2정탐꾼을 가나안땅에 보냈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다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바람에 20세 이상 장정은 광야 40년동안 광야에서 다 죽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말씀을 듣고 있는 대상은 애굽에서 나올 때 19세 이하였거나 아니면 광야여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선포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그들 중에는 그 당시 비록 장정은 아니었지만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이나 홍해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그 당시 19세 된 청소년들은 홍해의 기적을 경험했지만 그들은 20세가 되지 않았으므로 광야 40년에도 살아남았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 최고로 나이가 든 사람은 59세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듣는 사람과 신명기 5장에 있는 십계명을 듣는 대상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십계명을 듣고 있는 대상은 출애굽 1세대이고 신명기5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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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4장을 통해 살펴본 레위인의 직무 민수기 4장은 성막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의 사명이 무엇인지 다루고 있다. 레위는 야곱의 3번째 아들로서 오로지 성막에서 봉사하는 직무만 맏았다. 반면 나머지 11개 지파는 전쟁에 나가는 임무가 주어졌다. 레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게르손’, ‘고핫’, ‘므라리’이다. 그렇다면 모세와 아론은 레위지파로서 어느 족보에 해당되는지 알아야 한다. 모세와 아론(모세의 형)의 아버지는 아므람이고(민3:27, 출6:18-20참조). 아므람의 아버지가 고핫이다. 그러니까 모세는 고핫 자손에 해당된다. 그러고 보면 고핫 자손 중에서 모세가 나왔고 아론이 나왔다. 그리고 모세의 형 아론은 제사장이 되었다. 아론의 자손을 제외한 나머지 고핫 자손들은 30-50세 때까지 성막 안에 있는 기구들(언약궤, 촛대, 진설병, 번제단 등 )을 행군시에 옮기고 도착해서는 원래대로 설치하는 일을 맡았다. 이 때 이것을 옮기고 설치하는 일에 실수하지 않도록 철거부터 포장하는 일, 그리고 옮기고 설치하는 일까지 일일이 관리 감독하는 사람들이 제사장이었던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었다. 왜냐하면 성막의 모든 기물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기에 함부로 다루면 죽기 때문이었다(민4:20). 그렇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섬기고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보자. 혹여 하나님을 불경건한 자세로 섬기고 있지는 않은가? 게르손 자손들에게는 주로 성막의 휘장(울타리 휘장, 성소와 지성소의 덮개 등) 등을 걷어 옮기는 일이 주어졌다. 마지막으로, 므라리 자손들에게는 성막의 말뚝이나 널판과 같은 것을 옮기는 일이 주어졌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핫 자손들의 경우 기물들이 아무리 무거워도 어깨에 메고 옮긴 반면 게르손, 므라리 자손들은 수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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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압을 통해서 바라본 교만의 종착지 다윗의 왕국이 든든히 서는데 있어서 꼭 거론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을 꼽으라고 했을 때 다윗의 조카이자 장수였던 요압(이복누이의 아들)을 들 수 있다. 그런데도 요압은 삼하 23장에 다윗의 왕국에 일조한 많은 인물들 속에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압의 아우 아비새, 요압의 아우 아사헬은 등장해도 요압이 다윗 왕국에 공헌한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요압의 병기든 자로 소개된 나하래는 등장하지만 정작 요압 자신은 명단에 올라가 있지 않은 점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삼하 3장 39절에서 다윗은 요압을 계륵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내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그 당시에 다윗은 사울 왕이 죽고 나서 헤브론에서 유다지파의 왕으로만 등극 했을 뿐 아직 이스라엘 전체지파를 다스리는 왕은 아니었다. 즉, 사울이 전사하고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2년 동안 통치하며 유다지파의 다윗과 대립하는 관계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때 요압의 동생이었던 아사헬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이스보셋의 군사령관이었던 아브넬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는 일이 발생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때 다윗의 적이자 요압의 적이었던 아브넬이 이스보셋을 배신하고 다윗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되는데 이때 투항하고 돌아가는 아브넬을 요압이 불러서 몰래 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실을 다윗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며 요압이 개인적인 복수심에 불타서 아브넬을 살해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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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사건 속에 담겨진 의미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사건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요21:25)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기적사건들이 복음서에 기록된 것 외에도 더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기적사건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예수님의 기적사건 하나 하나에는 사실 여러 가지 의미가 그 속에 담겨있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장정기준으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들은 한 마디로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에서 출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기적사건은 또 다른 의미가 그 속에 담겨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그 당대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우물 안에 살고 있는 개구리와 같아서 우물 밖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우물 밖의 소식을 알게 하는 방법은 그들 스스로가 우물 안에서 탈출하거나 아니면 우물 밖의 개구리가 와서 바깥세계를 알려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주님은 우물 안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인생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영원한 세계에서 인생들에게 찾아오신 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기적이 상식처럼 되어 있는 병 고침과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행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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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 사람은 약속을 하거나 말을 하고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말한 것을 잊어버리거나 약속을 지킬만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지키지 못하는 경우, 또는 중간에 변심 등의 다양한 사유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은 어떠하실까? 우리처럼 말씀을 하시고 지키지 못하시는 분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제사장 엘리의 가문에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를 통해서 살펴보자. 엘리는 사사시대 말기에 대제사장의 직분을 맡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홉니와 비느하스다. 그런데 문제는 제사장이었던 두 아들이 하나님 앞에 악한 제사장이었다는 점이다. 성막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을 하고, 번제나 화목제 같은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강압적인 자세로 제물의 일부분을 강제로 갈취하는 등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를 멸시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땅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에 자신의 분깃을 요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름과 콩팥을 번제단 위에서 다 태우기도 전에 생고기를 요구하거나 임의로 쇠갈고리를 솥에 넣어 걸려 나오는 고기를 갈취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범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어 엘리가문에 하나님의 저주가 선포된다. 그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는 중에도 엘리가문 만큼은 복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말씀과 함께 그의 후손들이 모두 젊은 나이에 다 죽게 되므로 노인이 하나도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 말씀은 초대 왕 사울 때에 성취되기에 이른다.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서 도망 다닐 때 다윗 일행이 놉의 제사장이었던 아히멜렉에게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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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명을 주신 이유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즉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나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닦아 주신 후에 주신 계명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엄밀히 말해 새로운 계명은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 모세를 통해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이미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이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8)”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구약에 이미 있었던 계명을 새로운 계명이라고 하시면서 주셨을까? 그것은 예수님 당시에 구약의 말씀이 실천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레위기를 통해서 이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선포되었으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대에 이르기까지 이 말씀은 삶속에 실천되지 않았던 무용지물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그것을 취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에게는 여전히 새로운 것이 되는 이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요즘 새로운 영화가 극장마다 쏟아져 나오는데 영화를 즐겨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과거에 이미 상영된 영화도 새로운 영화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봤을 때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계명은 구약에 이미 있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계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이 그토록 중요할까? 그것은 사랑만이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새롭게 만들어질 ‘하늘의 거록한 공동체(교회)’를 존속 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잠시 잠깐후면 주님을 배신할 제자들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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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의 감사(시편 30편) 시편 30편은 다윗이 어떤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1절에서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이러한 구원의 행위를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끌어낸다’는 히브리어 원어는 ‘달라’인데 그 원어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물에서 다윗을 끌어올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1절은 마치 우물에 빠진 다윗이 두레박을 타고 올라오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5절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노여움(고난)은 잠깐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잠시 잠깐 우리의 삶의 한 부분으로서 스쳐지나가는 고난에 깊이 사로잡혀 그 고난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고 휘청거릴 때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시편 30편은 고난만 바라보고 미래를 보지 못한 채 두려워 떠는 우리에게 희망을 버리지 말 것을 당부한다. 6절은 한때 다윗이 교만 했을 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교만하다 보니 형통함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러한 하나님을 잊고 마치 자기가 잘나서 형통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지난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로 형통함을 주신 사실을 망각한 채 고난이 찾아왔을 때 비로소 교만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하나님께 다시 회복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9절은 그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달라고 간구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죽음이 결코 하나님께 아무런 유익이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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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개관(탄원시, 찬양시, 감사시를 중심으로) 시편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졌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시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성경의 대부분의 말씀들이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말씀이라고 했을 때 시편은 말씀에 대한 신앙인의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그 반대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말씀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대하여 신앙인(개인,공동체)으로서 찬양(시), 감사(시), 탄원(시), 신뢰(시) 등과 같은 형태로 신앙을 고백한 것이 시편의 중심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다양한 장르의 신앙고백들이 시적인 운율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 사항은 찬양시와 감사시의 경우 그 경계가 분명치 않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찬양시와 감사시에는 두 가지 다 동일하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내용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시와 감사시는 구분이 되는데 예를 들어, 찬양시의 경우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한다고 했을 때 감사시의 경우 찬양과 경배의 동기가 분명히 있다는 점이다. 마치 우리가 예배때 드리는 헌금 중에 감사헌금이 있는데 “범사에 감사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헌금을 드리면 시편의 장르에서는 찬양시가 되는 것이고  “어려운 중에도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모든 일들이 잘 해결되었습니다.”라는 취지로 헌금을 드리면 감사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편에서 감사시의 대표적인 주제로는 질병으로부터의 치유, 적(원수)으로부터의 구원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시편의 등뼈’로 불리는 탄원시는 시편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는데 있다. 감사시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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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종착지(마26:36-56) 본문은 십자가 대속 사건을 앞두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주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특이한 사항은 예수님께서 기도를 부탁하실 때 제자들 전체에게 부탁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지 않으시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만 기도를 부탁하셨을까? 거기에 대한 분명한 이유는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 제자를 특별히 아끼시고 이들을 향한 기대가 그만큼 더 컸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는 사실이라 하겠다. 예수님은 이처럼 십자가 대속 사건을 앞두고 세 제자에게 기도를 부탁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아침 일찍부터 사역을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한 후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특별한 기도부탁에도 불구하고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모습에 아랑곳 하지 않고 홀로 기도하셨다. 주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을 분석해보면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해보면 기도의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십자가의 대속 사건이 예수님에게는 엄청난 큰 부담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을 데리고 가시면서 고민하고 슬퍼하신 모습과 세 제자에게 기도를 부탁하신 것에서 쉽게 발견된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단 한 번도 제자들에게 당신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하신 적이 없었는데 비단 십자가 대속 사건 앞에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큰일이었고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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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선구자(행7:54-8:8) 본문에는 초대교회 때 스데반집사의 순교를 통해서 복음이 확장 되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스데반 집사는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으로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내 자신이 이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은 하나님께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던 스데반을 계속해서 사용하시지 않고 순교의 제물로 받으셨다는데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심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서 순교할 때 왜 그냥 지켜만 보고 계셨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등장하는 이야기이지만 베드로 사도가 옥에 갇혀 죽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구출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제자들이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살지 못했다는데 있다. 즉, 성령세례를 받고 두려움은 떨쳐버렸지만 그들의 복음전파 사역은 여전히 이스라엘 땅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득이하게 핍박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초대교회 공동체를 사방으로 흩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빌립집사가 사마리아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함을 받은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도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해 도망갔던 사람들이 모여 세운 교회였는데 이 교회가 훗날 사도바울이 이방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전초기지가 된다. 결국 이러한 일들의 배후에는 순교의 제물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묵묵히 썩어진 스데반 집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교회공동체가 복음전파의 길로 나아가지 않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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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다윗의 용사들(삼하23:8-17) 본문에는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사로잡힌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다윗의 충직한 신하들이다. 본문의 배경은 다윗이 왕으로 등극한지 오래되지 않은 시점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그러다보니 다윗은 자신의 고향이었던 베들레헴이 그리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양을 치면서 목이 마를 때마다 마셨던 우물물이 그리웠다. 그래서 지나는 말로 신하들 앞에 옛일을 추억하며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 베들레헴이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던 블레셋의 영토가 되어 그곳에 갈수도 없고 그곳 우물은 더 더욱 마실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세 신하였던 야소브암, 엘르아살, 삼마는 적진에 침투하여 그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그 우물물을 떠와서 다윗에게 갖다 바친다. 이에 다윗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차마 생명을 담보로 한 그 물을 마시지 못하고 하나님께 부어드린다. 이렇듯 다윗 왕국에는 이들 외에도 충직한 신하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다윗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다윗의 높은 인격에서 비롯되었을까? 물론 다윗의 높은 인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다윗을 돕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에 이바지 하는 걸로 그들이 알았다는 데 있다. 그래서 그들은 철저히 다윗을 이스라엘의 등불로 보호하며(삼하21:15-22) 다윗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뿐만 아니라 한 때 다윗이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게 될 때 거의 모든 이스라엘의 민심이 압살롬에게 돌아섰음에도 불구하고(삼하15:13) 가드사람 잇대는 이방인(블레셋)의 신분으로 자신의 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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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사람들(출2:23-3:12) 본문에는 인생의 막바지에 하나님을 만난 모세선지자가 등장한다. 모세의 삶을 돌아보면 40년동안은 인생의 황금기로서 애굽 왕궁에서 바로의 딸의 아들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도 전에 정치적인 싸움에서 밀려나 미디안 광야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집에서 사위가 되어 이드로의 양떼를 치게 된다. 모세가 양을 친다고 하는 의미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애굽인들에 있어서 양을 치는 일은 가증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창46:34).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애굽인들은 돼지를 목축하는 자들을 가장 싫어했고 또한 소, 양,염소 등을 치는 사람들도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고 보면 모세는 애굽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전락된 셈이다. 왕자의 신분에서 쫓겨나 미디안 광야에 거주하는 것도 서러운 일인데 애굽인들이 가장 혐오스럽게 여기는 직업 중에 하나인 목동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세에게 있어서 단순한 한 개인의 몰락을 넘어 가장 낮은 자리에서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세월은 40년이나 지속되었고 모세의 나이는 어느덧 80세가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에 찾아오셨다는 점이다.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고대 사회에서 신을 벗는 다고 하는 의미는 자신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은 거룩한 곳이기에 신을 벗으라는 의미도 있지만 이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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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길을 가는 사람들(창28:10-22)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은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고 도망 나온 야곱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28:18)”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에 대한 증거로 평탄한 삶을 기대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을 받은 야곱의 삶을 살펴보자. 하나님의 약속대로 야곱의 삶은 평탄했는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야곱의 삶은 결코 평탄한 삶이 아니었고 육신의 눈으로 봤을 때 더 이상 복 받은 삶이 아니었다(창47:9).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빼앗고 나서부터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외삼촌 집에서 20년동안 양치기로 고생하며 살았다. 그나마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객지 생활 말년에 가서야 비로소 재산을 가실 수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도 평탄치 않았다. 외삼촌 집에서의 객지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4명의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얍복강에서 천사를 만나 씨름을 하다가 허벅지를 다쳐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겜 땅에서 자신의 외동딸 디나가 세겜 족속에 의해 강간을 당하기도 하였다. 베들레헴 근처에 왔을 때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야곱의 12번째 막내아들 베냐민을 낳으면서 죽게 되었다. 야곱은 극한 슬픔의 상태에서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라헬이 죽어가면서 ‘베노니(슬픔의 아들)’라고 이름을 짓자 야곱은 아들의 이름을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이라고 부르자 하면서 라헬을 설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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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을 건진 사람들(요8:1-12) 본문에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등장한다. 율법에 의하면 간음죄는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이 여인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런 절망 중에 놓인 한 여인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붙들고 예수님을 찾아 왔다. 예수님을 찾은 목적은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랑이 충만하신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불쌍히 여겨 그냥 살려두라고 하면 율법(십계명)을 어긴 죄로 예수님을 고발할 참이었고 만약 죽이라고 하면 늘 사랑을 강조했던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죽이라고 충동질 했다고 여론을 만들어갈 참이었다. 예수님이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에게는 인생들에게 없는 마지막 한 수와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다 돌을 내려놓고 자리를 떠났다. 희망이 없는 자리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니 희망이 싹튼 것이다. 사람들은 다 떠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았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리고 또 주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렇다. 주님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시다. 우리 영혼에 어둠이 가득할 때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게 될 때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믿어야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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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단1:1-2:1) 본문에 등장하는 다니엘은 설교시간에 신앙적 롤 모델로 가장 많이 소개되는 인물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 이유는 바벨론 제국으로 노예의 신분으로 포로로 끌려갔지만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죽음을 담보하면서까지 믿음의 정절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그의 믿음을 인정하셨다는데 있다. 그래서 성경은 다니엘을 노아, 욥과 함께 구약의 3대 의인 중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겔14:14).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왜 3대 의인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고 했을 때 이제부터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살펴봄으로써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도 어떤 신앙의 자세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본문에 의하면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들(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은 포로의 신분으로 바벨론에 끌려온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 외에도 끌려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다(단1:6, 10, 13). 다니엘을 포함한 그들의 신분은 전반적으로 왕족과 귀족(단1:3), 박식한 사람, 각 분야에 있어서 장인들로서 일반노예들처럼 일을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 바벨론의 선진 문물을 배우게 하여 바벨론 제국 내에서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 쓸 재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끌고 온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3년 동안 학문을 갈고 닦은 후 그들은 비록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철저히 바벨론 제국 내에서 왕국의 안녕을 위해서 쓰여 질 관료가 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던 것이다. 이제 이 과정만 잘 통과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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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사람들(마4:12-25) 오늘 본문에는 우리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병든 자, 가난한자, 고아, 과부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 주신 분으로서 그 당대에 소외당한 사람들의 친구로 오셨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생애 사역의 시작도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닌 그 당대에 유대 사회의 변두리로 여겨졌던 갈릴리에서 시작 되었다. 본문에 등장하는 스불론 지역은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이 그곳에 속해 있었고 납달리 지역은 예수님께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파하신 가버나움이 있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곳을 지칭하여 ‘이방의 갈릴리’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변두리 지역으로 이방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를 대항하여 늘 폭동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으로 유명하다. 기록에 의하면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던 헤롯 대왕 때에 만 번 이상의 폭동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보니 일반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기피 대상 지역이었고 로마인들에게 있어서도 늘 골치 아픈 지역으로 여겨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이 바로 이방인 취급을 당했던 그곳에서 시작되었다는데 있다. 예수님은 아무도 찾지 않는 그들에게 찾아가신 것이다. 그 당대에 수많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있었고 종교지도자들(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율법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열심에만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의로움만 드러낼 뿐 정작 잃어버린 주님의 양들에게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처럼 떠돌아다니며 유리하는 그들을 직접 찾아가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역의 시작이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유대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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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 계신 하나님(창28:10-19)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은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너는 복이 될지라...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2-3)와 같은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야곱은 이런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이 자신을 통해 점점 구체화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된 아들이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어떤 사역을 감당할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눅2:33, 50).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야곱을 향한 계획을 다 알고 있지만 정작 당대에 살고 있었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은 그러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도 마찬가지이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갔지만 그일 역시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요셉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셋의 후손을 통한 에덴의 회복 계획이 아담의 10대손 노아를 거쳐 아담의 20대손 아브라함 때에 와서 비로소 그 계획이 구체화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것을 이루시기 위해 100세에 이삭을 주셨고 이삭의 아들 야곱은 12아들을 낳아서 그들이 훗날 12지파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을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가게 하여 거기서 총리가 되게 함으로써 훗날 야곱의 모든 가족들이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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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가죽부대를 준비하자(눅5:36-6:11) 오늘날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범하기 않기 위해서 안식일 전날 엘리베이터가 매 층마다 설 수 있도록 자동으로 설정해 놓고 엘리베이터에 버튼도 누르지 않는다. 안식일 전에 잘못 켜놓은 전열기구나 전등도 안식일을 범하지 않기 위해 스위치 조작도 하지 않는다. 굳이 조작한다면 지나가는 이방인을 불러서 스위치를 꺼 줄 것을 부탁한다. 오늘날 유대인들의 신앙모습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그들의 신앙이 오늘 우리보다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하며 그런 신앙을 가지고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수 없다고 외쳤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례요한처럼 설교 메시지를 교회 강단에서 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 그 교회는 당장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메시지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교회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교회는 이 세상에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천국문이 아닌 지옥문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회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를 마치 부적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주님은 분명하게 찾는 이가 적더라도 좁은 길로 가라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런 측면에서 북 왕국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아합이 왜 망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합이 아람과의 전쟁에 나갈 때 선지자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때 그 당대에 400여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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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으로 남을 것인가? 왕으로 남을 것인가?(삼상17:23-40) 작은 일의 중요성에 대해 일본의 한큐철도 설립자 고바야시 이치조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신발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면 세상에서 신발 정리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 되라. 그러면 세상은 당신을 신발 정리만 하는 심부름꾼으로 놔두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멋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여기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25:21)” 고바야시 이치조의 명언은 일맥 성경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자신을 살펴보자. 나는 직장에서 어떤 자세로 임하고 있는가? 교회에서는 어떤 중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가? 혹여 마지못해 어쩔 수 없어서, 먹고 살기위해서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교회에서 내게 부여된 직분을 사명감이 상실된 채 억지로 하고 있지 않은지를 살펴봐야 한다. 오늘 본문 속에는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이유가 들어 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목동에 불과했다. 그것도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 막내로서 그 아버지 이새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당시 목동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가 목동이 되었는데 다윗도 이새의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약한 존재였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베들레헴에 찾아와서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며 이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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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일로 중시하라(레23:23-44) 독일의 한 병원에서 있었던 일로 전해진다. 교회와 예수님을 지독히 싫어하는 출산 직전의 한 산모가 기독교 병원에 입원하였다. 기독교 병원이다 보니 병실의 벽에 예수님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그것을 본 산모가 예민하게 반응하며 신경질적으로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저기 걸린 예수 사진 보기 싫으니 당장 치워요” 남편은 국회의원이자 장군출신이었는데 아내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어쩔 수 없이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가 오자 산모는 또 소리를 쳤다. “저 예수사진보기 싫으니 태어나는 내 아이에게 제발 예수가 안 보이게 해 달라구요” 간호사는 너무나 황당한 일이라 의사에게 보고했고, 의사는 병원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병원장은 산모의 그 요청을 거부하고 병실에 예수님의 사진을 그대로 두었다. 그러자 산모가 더욱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저 예수가 보이지 않게 해라, 내 아이는 저 예수를 못보게 해라” 산모가 극도로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라 출산에 문제가 될 것 같아 병원장은 결국 사진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는데 그 순간에 산모가 진통을 하며 아기를 출산했다. 그런데 출산을 돕던 의사와 간호사가 아기를 보고 그만 깜짝 놀랐다. 태어난 아기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두 눈이 없는 것이었다. 산모의 간절한 소원(?)대로 정말 예수(사진)가 안보이게 된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출산한 아기를 본 산모는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하나님(예수님)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기 위해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종 제물(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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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사역의 출발점(몬1:1-25) 본문에 의하면 골로새 교인 중에 한 사람이었던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도망을 쳤다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지금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과 함께 있다. 여기서 오네시모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영접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노예의 신분이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의 주인 되는 빌레몬에게 노예로서 도망친 것에 대한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시 받아주고 용서해 줄 것을 서신을 통해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빌레몬의 모습은 교회공동체에 늘 믿음의 귀감이 되고 본이 되는 인물로 평가된다(4-7). 그렇다보니 빌레몬으로 인해 교회공동체가 평안함을 얻고 바울 자신도 기쁨과 위로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늘빛공동체에서 내 자신이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돌려보내기 전에 편지를 통해서 과거의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 존재였다 할지라도 이제는 복음을 영접하여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동역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울의 진정한 동역자로 남기위해서는 빌레몬의 용서가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오네시모는 노예로서 빌레몬에게 어떤 잘못을 범한 것일까? 본문을 통해서는 정확히 나타나지는 않지만 문맥상(18-19절) 오네시모가 과거에 빌레몬의 집에서 돈을 훔쳐 도망 나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빌레몬은 오네시모에 대한 감정이 결코 좋을 리가 없는 것이다. 노예의 신분으로서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오네시모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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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요21:14-19) “내가 만약 1,000 파운드의 금화가 있다면 모두 다 중국을 위해서 쓸 것이고 내가 만약 1,000개의 목숨이 있다면 중국을 위해서 그 중 하나라도 남겨둘 수가 없다.” 50여 년 동안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며 자비량 선교로 평생을 주님께 몸 바쳤던 중국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1832~1905)의 말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열여덟 살에 선교에 헌신하여 73세에 하늘로 부름 받을 때까지 50여 년을 중국 선교에 헌신한 중국선교의 대부였다. 노년에 그는 커다란 꿈을 안고 선교사로 지망한 젊은이들의 방문을 받았다. 선교사 지망생들은 평생을 중국선교로 몸을 바쳤던 허드슨 테일러로부터 중국선교에 대한 조언을 듣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이때 허드슨 테일러는 자기를 찾아 온 젊은이들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중국에서 선교를 하려고 합니까?” 그러자 한 젊은이가 대답했다. “나는 이 황무지와 같은 미개한 중국 대륙에 커다란 교회들이 여기저기에 서는 것을 보고 싶어서 입니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저는 이 중국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미개한 삶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허드슨 테일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런 동기를 가지고서는 이 중국 땅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젊은 선교지망생들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선교사님은 이 중국 땅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이 선교 사업이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이 중국을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허드슨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닙니다. 나는 중국이 사랑스러워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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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길, 복의 길(잠8:12-36) 잠언에는 우리 인생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방법들이 짧은 한 두 문장에서 길게는 여러 문장에 걸쳐 제시되어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생명의 길에 서있고 복의 길에 서있는지에 대해서 열거하고 있다. 잠언의 다른 여러 구절들과 비교했을 때 차이점이라면 비교적 한 주제에 대해 아주 긴 문장으로 소개되어 있다는 점이다. 본문의 17절에 의하면 나(지혜)를 사랑하고 나(지혜)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지혜)의 사랑을 입고 나(지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나’ 즉 ‘지혜’는 누구를 지칭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지혜의 근본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즉 다른 표현으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바라보고 신뢰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에서도 한 우물을 파고 한 곳에 집중한 사람들이 성공했다는 사례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페이스북 창립자인 마크 저커버그(1984년 미국태생 / 33세)도 그 중에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이 시대의 성공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평소 통큰 기부로 유명한 그가 또 한 번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과거 신문 기사에는 저커버그 부부가 의학연구에 10년에 걸쳐 30억 달러(약 3조 3천억원)를 기부한다는 내용이 올라와 있다. 2015년 12월에는 자신의 딸 ‘맥스’가 태어난 후 “모든 부모처럼 우리는 딸이 더 나은 세상에서 자라기를 바란다”는 공개편지를 선보인 후 페이스북 지분 중에 99%(약 49조6700억원)를 생전에 기부하겠다고 밝혀 세상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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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일본의 한 여학교 기숙사에서 있었던 일로 전해진다. 어느 날 도둑이 기숙사에 들어왔다. "꼼짝말고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귀중한 것은 다 내놔!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릴꺼야!" 이에 학생들이 겁이 나서 하나 씩 둘씩 돈이 될 만한 것을 도둑 앞에 내놓았다. 그런데 돈이 될 만한 것을 다 챙긴 도둑이 막 나가려고 하는데 한 여학생이 도둑에게 말을 건넸다. "아저씨! 중요한 것은 다 가져 간다면서 가장 중요한 저 책은 왜 안 가져가세요?" 그러자 도둑은 그 여학생이 가리킨 낡은 책도 얼떨결에 챙겨서 나왔다. 이렇게 해서 훔친 물건들을 내다 파는데 이상하게 그 책만큼은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혼자 그 책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도대체 아무도 안사는 이 책이 왜 중요하다는 거야!" 도둑은 궁금한 나머지 그 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책을 읽는데도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여학생이 중요한 책이라고 말했던 그 말이 계속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읽고 또 읽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그 책을 읽으면서 그만 변화되고 말았다. 그 도둑이 읽은 책은 다름 아닌 성경책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도둑은 결국 회개하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목사가 되었다. 도둑이 변화되어 목사가 된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과거에 도둑이었던 그 목사는 어느 한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거기서 그 목사는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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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공개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위험성 고대세계에서 이름을 알려주는 행위는 관계를 맺는 친밀감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친밀감의 관계는 이내 하나님의 이름이 악용되거나 모욕을 받을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래서 십계명 중의 하나는 인간들의 그러한 악용으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보호한다고 할 수 있다(출20:7; 신5:11). 그렇다면 우리 인간사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름을 알려주는 행위는 친밀함을 갖게 한다고 했을 때 한 가지 문제점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이러한 친밀함이 자칫 잘못하면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는 이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이런 소지가 다분하다. 부부가 되기 전 서로 남남이었을 때는 오히려 관계가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부부가 되고나면 어떻게 바뀌는가? 서로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가까운 사이일수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태에 봉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시면서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아셨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요13장 16절-17절에서 한 가지 주의 사항을 주셨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주님께서는 정확하게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보셨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이 주님을 우습게 볼 소지가 있었다. 주님은 철저히 그것을 경계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경고를 무시한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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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4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이사야 54장은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을 향한 회복에 대한 말씀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 오시기 전(주전) 약 700년 전에 활동했던 남 왕국 유다의 선지자이다. 그 때는 남 왕국 유다의 의로운 왕이었던 히스기야 왕이 통치했던 시대였기에 아직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지도 않은 시대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사야 54장이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에 대한 말씀이 미리 선포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시대에 먼 훗날 그 사람이 병들었다가 치유되어 몸이 회복 되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그렇다보니 54장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은 이사야54장이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말씀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기록했다고 생각하면서 제1 이사야(1-39장), 제2 이사야(40-55장), 제3 이사야(56-66장)라 부르기도 한다. 다시 말해 제1 이사야만이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것이고, 제2, 제3 이사야는 이사야 당대에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이사야가 죽고 나서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40-66장이 이사야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이후에 대한 회복에 대한 이야기가 줄기차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하지 않고 그 후대에 누군가가 이사야라는 이름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무시하는 불신앙의 행위라 할 수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미래를 예언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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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6장을 통해 바라본 하나님의 영광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종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릴 때가 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들이 영광의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희생이 따른다는 점을 간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내 자아를 죽이고 십자가에 자신을 철저히 못 박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작게는 언행을 삼가 하는 것은 물론 시간과 재능, 물질도 기꺼이 주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기쁨으로 내놓아야 한다. 더 나아가 구약시대의 3대 의인 중 하나였던 다니엘처럼 자신의 생명을 지불해야 하는 결단을 요구할 때도 있다는 점이다. 다니엘 6장에 등장하는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소년 다니엘이 아니라 바벨론제국을 거쳐 바사(페르시아) 제국에서도 총리의 자리에 오른 노년이 된 다니엘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등장하는 다니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소년시절 그의 세 친구들과 함께 왕의 진미를 거부한 다니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신앙을 오래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릴 때가 많은데 6장 본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다니엘은 여느 다른 사람들과는 분명 달랐다. 노인이 된 다니엘이지만 그의 신앙에는 변함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을 거쳐 바사 제국에서도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던 인물로 평가된다. 한 달 동안 다리오 왕 외에는 어떤 신에게도 절을 하거나 기도를 할 수 없는 금령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자신의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금령을 범했을 때 사자 굴속에 던져지는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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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에서 강한 사람(요14:21-24, 15:1-17)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9년에 폴란드는 나치 독일에게 점령되었다. 이 때 폴란드 출신의 콜베 신부가 유태인을 포함한 전쟁 난민들을 숨겨주는 인도적인 일을 하게 되는데 이 일로 인해 1941년 다른 4명의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게 되었다.  죄수번호는 16670. 수용소의 규칙은 수감자 한명이 도망쳤을 경우 그 사람이 속한 방의 열사람을 무작위로 차출하여 지하 감방에 가두어 굶겨 죽이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콜베 신부가 구금된 방에서 수감자 한명이 탈출했다. 이에 콜베신부가 수감된 방에 열사람이 무작위로 뽑혀 잡혀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중에는 폴란드군의 중사였던 가요브니체크라는 사람이 울부짖으며 통곡했다. “오, 내 아내와 아이들, 내게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러자 콜베 신부가 그 사람 앞으로 나가면서 자원했다. “내가 이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습니다”  이에 콜베신부와 나머지 9명의 죄수는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아사형에 처해지면 굶주림으로 정신착란 상태에서 죽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콜베신부는 의연하게 다른 포로들에게 “우리는 곧 천국에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용기를 주었다.  감옥의 모습을 본 한 통역자(브루노 보르고비에츠)는 “감옥 안에서 기도와 성가가 들려서 마치 감옥이 성당처럼 느껴졌습니다”라고 증언했다. 2-3주의 시간이 지났지만 콜베신부와 다른 3명은 여전히 살아있었는데 다른 죄수들을 가두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콜베신부를 비롯한 3명을 1941년 8월14일에 독약주사를 놓아서 살해하게 되었다. 이야기 속에 나타난 콜베신부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 보기를 바란다. 우리와 똑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성경 속에 나타난 말씀을 이론으로만 여기지 않고 실제로 삶 속에 적용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콜베 신부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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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의미(마27:62-28:15)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축복은 영원한 생명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삶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인류사에 죽음이 들어오게 되고 그 죽음은 지금까지 인류사에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보니 인류사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이 등장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람이 중국의 진시왕이다. 불노초와 불사약을 구해 영원히 살고자 했지만 한 줌의 흙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은 비단 진시왕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전3:11). 그래서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느냐에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기사가 간혹 메스컴을 통해서 나오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나(에녹, 엘리야) 죽은 사람이 살아난 사례가 있다(왕하4:17-37).  신약에서도 예수님을 통해 나사로를 비롯한 나인성 과부의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사례도 소개되어 있지만 그들은 얼마동안 살다가 다시 죽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죽었다가 살아난 이러한 일들은 무엇을 예표하고 있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는가?  구약에 죽은 자가 살아난 사건은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통해 나타날 부활의 그림자(모형)이자 세상 끝날,  즉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모든 성도에게 주어질 부활의 모형으로서 제시되었다는데 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단순히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사건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활이란 예수님의 몸처럼 신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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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힘 (롬12:14-21, 13:8-10) 미국의 선교사 중에 우리나라에 와서 1951년부터 1974년까지 25년간 광주기독병원장으로 재직하며 의료선교를 했던 커딩턴(한국 이름으로 고허번) 박사가 있었다. 이 분은 스스로 자신을 ‘광주 커씨’라고 말하며 유난히 한국을 사랑했는데 평생을 선교사로 헌신한 분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광주의 성자’로 불리면서 결핵 환자의 재활 치료와 윤락 여성들을 선도하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다. 그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시골로 이동진료를 다니며 가는 도중에 차 안에서 계속 전도지도 돌렸다. 커딩턴의 삶은 너무나 검소했는데 번듯한 옷 한 벌이 없었다. 그래서 넥타이 없이 늘 나일론 셔츠차림이었다.  그러던 중 병원에서 어떤 기념일을 맞이하여 커딩턴 박사에게 양복을 해주게 되었는데 다음 날이면 그 양복마저 어려운 사람들에게 벗어주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의 집에는 세수비누조차 없어 아내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선교비로 받은 돈을 거의 다 결핵 환자를 위해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자녀들에게까지 신문팔이를 시켰다고 전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가난해서 집에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던 자녀들이 이웃집에 말려 놓은 보리밥을 먹다가 도둑으로 몰려 커딩턴 박사가 욕을 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선교를 하던 커딩턴은 경제가 발전한 한국에서 계속 일하는 것보다 자신을 더 필요로 하는 어려운 나라로 간다며 1970년대 말 방글라데시로 떠나게 된다.  이 분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데 그 중에 한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 간호사가 숨을 헐떡이며 의사였던 커딩턴을 불렀다. 푸른 눈을 가진 커딩턴 의사가 급히 달려간 곳은 병원 안의 여자 화장실이었다. 한 폐결핵 환자가 용변을 보다가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환자의 입 속에는 피로 뒤범벅이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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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이해: 요한복음 8장. 세례요한의 그리스도 이해 요한복음1장 서두 부분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소개하고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시공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계신 분으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그 예수님만이 인생들에게 참 빛이며 그 분 안에 생명이 있다고 증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지만 영접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이 요한복음 1장 서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배경 가운데 세례요한의 등장은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중재자인 셈이다. 세례요한은 많은 사람들에게 조만간 메시아가 도래할 것을 말하며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게 된다.  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으러 세례요한에게 나아간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유대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세례요한에게 보내어 어떤 권위를 가지고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정체를 분명히 밝히라고 말한다.  이에 세례요한은 자신에 대해 소개하기를 메시야도, 엘리야도, 구약에 예언된 모세와 같은 선지자도 아닌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보냄을 받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답변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곧게 펴고 돌을 제한 평평한 길을 따라 메시야가 오시는데 그 분은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그분의 신발 끈을 풀고 메는 일조차 자신에게는 과분한 일이다’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낮추게 된다.  그 당시에 신발 끈을 풀고 메는 일은 노예가 하는 일이라고 했을 때 세례요한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노예임을 많은 사람들 앞에 공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르 세례요한은 안드레를 포함한 자신의 제자들도 기꺼이 예수님께로 보낼 수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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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9장 이해: 예수님과 충돌한 사람 삭개오 미국의 폴 워셔 목사(미국 남침례교 교단 소속) 어느 날 집회 강사로 초청받은 교회에 상당히 늦게 도착했다. 그래서 주최 측 관계자도 강사가 늦어서 몹시 화가 났다. 그러자 폴 워셔는 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집회 강사로 초청받아 늦었지만 이번만큼은 꼭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다가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갑자기 고속도로를 달리다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타이어를 교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차에서 내려 타이어를 교체하는데 나사가 굴러 떨어졌고, 고속도로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채 제가 도로 한가운데로 나가 나사를 줍고 일어서는데, 그만 시속 200킬로미터로 달려오던 30톤 화물트럭이 나를 그대로 덮치고 지나갔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집회 시간에 늦은 것을 이해주십시오” 그러자 주최측 관계자가 말합니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불가능해요. 달리는 트럭과 부딪쳤는데 아무렇지도 않다고요?" 이에 대해 폴 워셔는 두 가지로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거짓말이거나 미친 사람의 말이거나....  이 예화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아주 간단하다. 트럭에 충돌하면 최소 중상을 입거나 사망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 이유는 트럭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왕의 왕, 이 우주보다도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와 충돌했는데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와 충돌했는데 우리의 인격이나 삶에 있어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와 결코 충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누가복음 19장은 예수님께서 3년 반 동안의 공생애 사역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도중에 있었던 일과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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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이해: 누가복음 6장 본문의 서두는 옛 것과 새 것이 충돌하는 장면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예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처럼 지켜온 ‘모세율법’과 예수님께서 가지고 온 ‘복음’의 충돌이었다.  이것을 누가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낡은 옷과 새 옷, 낡은 가죽부대와 새 가죽부대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 새 옷과 새 가죽부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가 본문 6장1절-11절, 27-45절 말씀에 등장한다. 즉 옛 것(모세율법)에 젖어 있었던 사람들은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을 손으로 비비어 입에 넣는 행위를 노동(추수)행위로 보았던 반면 새 것(복음)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은 이러한 행동을 노동행위가 아닌 배고픔을 당한 인간이 마땅히 취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시대 때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도망 나왔을 때 놉의 제사장이었던 아히멜렉에게 가서 제사장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어도 전혀 죄가 되지 않았음을 제시함으로써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옛 것(모세율법)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안식일 날 병을 고치는 것이 노동행위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새 것(복음)은 안식일날 병을 고치는 것을 노동행위가 아닌 생명을 구원하는 행위로 율법을 재해석 하셨던 것이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삶속에서 원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새롭게 정립해주셨다. 낡은 가죽부대를 가진 사람은 원수를 원수로 대했다. 거기에는 사랑이 철저히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새 가죽부대를 가진 사람은 사랑으로 충만할 것이다. 그래서 원수도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가지고 있는 가죽부대가 어떤 것인지 점검하도록 하자. 주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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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이해: 막14:27-52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 사건을 불과 하루 앞둔 시점을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중요한 시점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폭탄선언을 하시기에 이른다. 그러자 주님의 이러한 폭탄선언에 베드로가 반기를 들면서 다른 제자들은 주님을 배반하고 다 버릴지라도 자신만큼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하기에 이른다.  이에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게 되고 실제 주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고백했던 말이 한낱 거짓말 이었을까?’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베드로의 대답은 거짓이 아니었고 주님께 대한 고백이 진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주님께서 행하시는 많은 능력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자신 역시 주님께서 주신 하늘의 능력(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가지고 직접 그런 일들을 행했기 때문에(막6:12-13) 메시야로 오신 주님을 결코 배반할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은혜를 받아 믿음이 충만할 때는 교회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믿음이 거짓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왜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처럼 쉽게 주님을 배반하게 되었을까? 거기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부분이 바로 뒷부분에서 전개되는 말씀(막14:32-42)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특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제자에게 특별히 기도를 부탁하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기간 동안 주님은 단 한 번도 제자들에게 당신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 하신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공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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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이해: 마가복음 6장 1-29절. 마가복음 6장 1절-29절까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있어서 초기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30-56절은 그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 동네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말씀을 들은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깜작 놀라게 된다.  그 이유는 그 당대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율법사들로부터 듣지 못했던 특별한 말씀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신기한 능력을 행하는 것도 목격했기 때문이다(2절).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반응이다. 하늘의 말씀과 하늘의 신기한 능력을 맛보고도 예수님을 단순히 목수 요셉의 아들로 한정 지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시대부터 메시야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민족이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의 손으로 신기한 능력들이 나타나게 될 때 “혹여 이 분이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는 아닐까?” 하고 한 번쯤 의문을 품고 진지하게 다가갔어야 마땅하다.  메시야까지는 아니더라도 혹시나 이 분이 세례요한과 같은 선지자는 아닐까 하는 긍정적인 시각을 가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배척하고 무시했다는 사실이다.  더 가관인 것은 본문에는 없지만 눅4:28-29절에는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죽이려 했다는 데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고향 나사렛에서는 예수님께서 소수의 병자만 고칠 뿐 특별한 능력을 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구약에 예언된 약속의 실체가 자신들의 눈앞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메시야를 메시야로 볼 수 있었던 눈이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 복을 발로 차버린 셈이다.  복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을 발로 차 버렸기에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다. 사실 가장 많은 복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나사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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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장을 통한 신앙진단 마태복음 20장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가운데 있었던 이야기이다(17-18절). 그 러고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이제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십자가의 엄청난 고통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시점에 분위기 파악을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오른팔 같은 역할을 했던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로마의 총독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왕이 되었을 때 정치적으로 좋은 자리를 미리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오늘날로 말하면 총리, 장관과 같은 자리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를 앞세워 온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분개하게 된다. 좋은 자리를 형제가 다 차지한다는데 대해 불만을 품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생각보아야 한다. 지금 이 시점이 이런 육신적인 일로 소모전을 벌여야 할 때인가에 대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있어서 가장 힘든 시기를 예수님은 지금 보내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자리다툼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심정을 모르고 철없는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떼를 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고 보면 제자들은 현재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서 죽는 것처럼 예수님은 지금 십자를 지고 죽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데 철없는 제자들은 자리다툼만 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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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종교의 관계4 지구는 23.5도로 기울어져 매일 한 바퀴씩 도는 자전과 1년을 주기로 태양을 한 바퀴씩 도는 공전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전과 공전은 자연스럽게 공간이동을 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자전의 경우 지구의 적도를 기준으로 했을 때 1초에 500미터씩(시속1600km속도) 공간이동이 일어나는 셈이다.  공전의 경우는 더 엄청난 공간이동이 일어나는데 무려 1초에 30km씩 공간이동이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명체는 이런 엄청난 공간이동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점이다. 마치 파리가 달리는 차안의 공중에서 날라 다니지만 공간이동을 못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이다. 배를 타거나 자동차를 탈 때 멀미를 하는 사람도 지구가 엄청난 속도로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며 공간이동을 하고 있지만 어지러움을 호소하거나 멀미를 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지구라는 최고의 우주선에 타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신론 과학자들은 이러한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를 우연으로 몰아간다. 그러면서 성경의 말씀을 무시하며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이 하늘의 별처럼 그의 후손이 많게 될 것을 약속하시면서 하늘의 별은 셀 수 없는 것으로 말씀하셨다는 것과(창15:5) 예례미야 33장 22절에 하늘의 별은 셀 수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다.  그러는 와중에 16세기 독일의 위대한 천문학자 케플러는 별의 숫자를 1000-5000여개라고 발표하면서 성경을 불신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은 오류가 있는 인간의 산물로 인식되어졌다. 그러고 보면 과학자들은 별의 숫자를 최대 약 6천개정도로 인식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이 밝힌 바로는 전 세계의 해변에 있는 모래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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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종교의 관계3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의 물리학자 리차드 파인만은 우주의 질서 정연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 그 이유는 우주에는 과학자들이 밝힐 수 없는 신의 신비가 너무나 많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도서관에 들어간 아이들처럼 겸허할 것을 당부한다. 즉 아이들은 도서관에 들어가서 그냥 책을 읽을 뿐 저자나 책의 배열에는 관심 없다. 단지 아이가 이해하는 것은 누군가가 책들을 저술하였고 그 책이 지금 도서관 책꽂이에 질서정연하게 꽂혀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에 대해서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가 필요하다고 아인슈타인은 강조한다. 지성의 겸허함이 강조되는 대목이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오늘날 우주는 지금으로부터 약140-150억 년 전에 빅뱅(대폭발)을 통해서 우주가 발생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우주는 끊임없이 빛의 속도(1초에 30만km)로 팽창하고 있다. 이것을 과학에서는 ‘빅뱅이론’이라 부른다.  그러나 과학자들에 의하면 대폭발은 폭발의 강도에 따라 우주가 생성될 수도 있고 없을 수 도 있었지만 너무나 신기하게 적정한 폭발력에 의해 폭발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우주가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오늘날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천억분의 일만 팽창력(폭발력)이 작아도 우주는 만들어 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더하여 짚고 넘어갈 부분은 빅뱅이 어떤 원리로 일어났느냐에 대한 부분이다.  오늘날 과학의 논리를 다 동원해도 무(無)에서 유(有)는 결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시소가 수평을 이루려면 정확한 중심지에 있어야 하듯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똑 같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한에 가까운 수치의 정확성을 가지고 상공간에 정확히 점을 찍어야만 공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불가능한 정밀함을 요구하는 것으로써 10의 10승의 123분의 1의 정확성을 요구한다. 그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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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종교의 관계2 과학자들은 종교를 폄하하는가? 그렇지 않다. 과학을 지성과 이성의 영역이라 했을 때 종교는 믿음의 영역이다. 서로 영역이 다를 뿐이다. 사람은 지성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 반드시 믿음을 필요로 한다. 지성이 없으면 목적지나 길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성이라는 시스템이 자동으로 가동된다. 동시에 인간은 믿음이라는 시스템도 가동되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다.  가령 버스를 탈 때 기사에게 자신의 생명을 잠시 동안 맡기면서도 운전기사에 대해 뒷조사를 하지 않는다. 가령 사고경력이 있다면 얼마나 있었는지, 음주운전이나 졸음운전 사례는 없었는지 등을 묻지 않고 무조건 그냥 믿고 탄다. 이것은 믿음의 시스템이 자동으로 가동된 결과다.  이발소에서 면도 할 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명을 맡긴다. 여기서도 철저히 믿음의 시스템은 어김없이 가동된다. 그러므로 21세기에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세상 속에서 지성과 믿음의 시스템을 적절하게 조합해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후 최고의 과학자 리차드 파인만(1918년 출생. 미국의 무신론자)도 “과학과 종교의 관계”라는 글에서 과학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모순이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과학이 진리냐고 물으면 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아니오, 우리는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발견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같이 한 번 볼까요’ 라고 말하면서 종교이해를 시작하십시오.” 또한 아인슈타인 역시 과학과 종교 사이에는 진정한 대립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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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종교(믿음)의 관계 1 오늘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과학은 이성적인 영역인 반면 종교는 비이성적인 영역이라 여기고 종교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보니 과학은 지성적인 사람들의 소유물이고 종교는 자기의지가 약한 사람이 뭔가를 기대기 위해서 가상의 신(神)을 만들어 놓고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과학이 발달하여 인간의 지성이 강조되는 21세기에는 종교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과거의 유물정도로만 생각하며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폄하한다. 그렇다면 논리와 이성을 최고로 중시하는 과학자들은 과연 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까?  많은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종교는 21세기에 필요 없는 산물이며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불신자들의 말대로 의지력이 약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산물인기에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을까?  그리고 이런 종교적 이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21세기에 뒤떨어진 잘못된 사고를 가진 사람들로 여길까?  그렇다면 이제 과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1879-1955) 과학과 종교가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실재의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은 합리적이어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신념역시 종교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심오한 신념이 없는 과학자를 진정한 과학자라고 여길 수 없다... 종교 없는 과학은 온전히 걸을 수 없으며 과학 없는 종교는 온전히 바라볼 수 없다.” 아인슈타인의 말은 과학과 종교는 인류의 역사에 가장 오래된 선명한 흔적이기에 인간의 역사는 곧 종교의 역사이자 과학의 역사인 것을 의미한다.  아인슈타인 이후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로 불리는 리차드 파인만(1918-1988)은 무신론자임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종교의 관계’라는 글에서 과학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모순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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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 24장과 25장을 통해 바라본 솔로몬성전 2 역대상 24장에는 제사장 직분을 감당할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다. 참고로 제사장 직분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과 함께 성막제도를 받으면서 아론의 후손만이 독점할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아론의 아들들은 원래 총 4명이었다.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레위기 10장에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다가 향로에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서 분향하다가 즉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제사장 직분은 남아 있는 아론의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이어가게 된다.  참고로 이다말의 후손이 사무엘을 선지자로 키웠던 엘리 제사장이다. 이렇게 다윗은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후손들을 골고루 24반열(제사장들로 하여금 조를 24개로 나누어 자기 차례가 오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함)로 나누어서 순수한 제사장의 직분과 성전 밖에 나가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을 감당하게 하였다(대상24:5). 25장은 다윗 왕이 4천명의 레위인으로 구성된 찬양 대원들(대상23:5)을 24개조로 구성된 제사장들에 맞추어 찬양대 역시 24개조로 편성하는 장면이다(대상25:9-31).  그들은 성전에서 악기를 다루며 찬송(찬양대)을 맡게 될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각종 제사(번제, 화목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가 집행될 때 제사장 1개조와 찬양대 1개조가 한 팀을 이루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찬양대도 24개조로 편성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우두머리가 아삽, 헤만, 여두둔이다(대상25:1). 그러므로 찬양대는 철저히 이 세 악장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악장 밑에는 지휘자를 두어 운영하였다.  지휘자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아삽의 아들 중에 4명, 헤만의 아들 중에 6명, 여두둔의 아들 중에 14명이 지휘자가 되었다(대상25:2-5). 이들을 합치면 총 24명이다.  이들이 우두머리가 되어 24개조에서 각각 지휘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종합하면 3명의 악장 아래에 총 24개조로 나누어진 찬양대에 각 지휘자를 두어 운영하였는데 제사장들이 24개조로 나누어 성전에서 제사를 집례 할 때 이들 찬양대도 24개조로 나누어져 운영되었다.  그리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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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 22장과 23장을 통해 바라본 솔로몬성전 1 본문의 배경은 다윗이 성전건축을 하기 원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전쟁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죽임으로 피를 많이 흘렸기에 다윗에게는 성전건축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대신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대상22:6-10).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성전을 건축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 큰 나머지 성전건축에 필요한 모든 재료들(목재로부터 금, 은, 놋, 철 등, 그리고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전문분야의 인부들까지 준비한다. 대상22:14-16)을 철저히 준비하게 된다.  그렇다고 봤을 때 성전건축을 시작한 사람은 솔로몬이지만 실질적으로 성전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한 사람은 다윗이다. 성전을 지을 때 꼭 필요한 설계도면까지 하나님은 다윗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성전 건축에 있어서 밥상에 숟가락과 젓가락 정도 올리는 수고 밖에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성전을 우리는 솔로몬 성전이라고 부른다.  다윗은 성전건축에 필요한 재료뿐만 아니라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도 성전 안에서 레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효율적으로 잘 섬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가운데 레위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해 우선 레위인 들의 수를 30세 이상으로 계수하게 된다.  그랬더니 30세 이상의 레위인 성인 남자 숫자가 38,000명이었다. 여기서 24,000명은 성전 안에서 제사집례에 필요한 각종 일을 하는 사람으로, 6000명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재판을 맡는 사람으로, 4000명은 성전 문지기, 나머지 4000명은 악기를 만들어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찬양대로 나누게 되었다(대상23:1-6).  그 외에도 성전 안에서 각 사역에 있어서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될 고핫(야곱의 3째 아들이었던 레위의 둘째 아들), 게르손(레위의 첫째 아들), 므라리(레위의 셋째 아들) 자손들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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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병자의 믿음2(막2:1-12) 우리가 예수님께로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자 할 때 반드시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사단은 결코 우리를 예수님께로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그냥 두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우리의 믿음을 떨어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기도를 못하게 하고, 성경을 못보게 하고, 전도를 못하게 하는 등의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마치 사단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핍박을 통해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막고자 했던 것처럼 우리역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아감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철저히 분석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뛰어넘어야만 한다. 뛰어넘지 못하고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거나 쉽게 포기한다면 결코 우리가 계획하고 기도하는 일들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은 장애물을 만났을 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믿음은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위기 속에서 행함이 있는 살아 있는 믿음으로 역사되었다(약2:17).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할 차례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예수님은 나의 삶에 있어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가? 꼭 필요하신 분인가? 아니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분인가?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기에 성자 세바스찬도 죽음을 각오하고 왕에게 나아갔던 것이며 40명의 병사도 얼음위에서 동사하였던 것이다. 사도 바울역시 마찬가지였다.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바리새인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고 로마의 시민권자로서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는 로마에서 배교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가 목베임을 당해 순교했다.  이처럼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분명한 믿음의 고백 없이는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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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병자의 믿음1(막2:1-12)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시던 중 어느 날 가버나움에서 한 중풍병자를 고치시게 되었는데 그 사연이 독특했다. 본문에 의하면 한 중풍병자가 친구들에 의해 들것에 실려 예수님께로 나아오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께로 가면 배고픔이 해결되고 어떤 질병도 고침을 받고 문제를 해결 받는다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들것에 실려 온 중풍병자는 사람들로 인해 더 이상 주님께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이 택했던 방법은 정면 돌파를 포기하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천정을 향해 아래로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들것에 끈을 매달아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아무런 희망 없이 살던 사람에게 새로운 삶이 선물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중풍병자가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믿음은 누구로부터 비롯되었을까? 중풍병자의 믿음이었는지, 친구들의 믿음이었는지, 아니면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믿음이었는지를 본문을 통해서는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믿음이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서 어느 한쪽이라도 예수님께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목적 달성은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으니 오늘은 그냥 돌아 가자거나, 다음에 만나서 고침을 받자는 등의 이야기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극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나아갔던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예수님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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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로마제국의 갈등2 A.D 288년경 로마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그의 부하 장교 중에 세바스찬이 있었다. 그는 군인들의 의무였던 황제가 믿는 신들에게 제사하기를 거부하여 반역죄로 체포되어 기둥에 묶여 화살로 처형을 당했는데 마침 지나가는 여인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몸이 회복된 후 세바스찬은 황제의 마차가 지나가는 길목에 나타나 크게 외쳤다. “폐하는 왜 무고한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십니까?”이에 황제는 죽은 줄로 알았던 세바스찬이 나타나 깜작 놀랐지만 다시 체포하여 참수하였다. 320년 동로마의 황제 리키니우스는 자신의 군대에서 기독교 병사들을 색출하여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때 아르메니아 북부 세바스테 지역에 주둔한 로마 12군단에서도 많은 기독교 병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재조사를 통해 다시 40명의 기독교 병사들이 체포되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가 한 겨울이었다. 지휘관들은 이렇게 체포된 40명의 병사들을 동사시키기 위해 호수 위 얼음위에 알몸으로 세워두었다.  그들의 옆에는 예수를 부인하면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는 따뜻한 목욕탕도 세워두었다. 그때 추위와 죽음을 이기지 못한 한 병사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 경비병 중 한명이 나머지 39명의 신앙에 감동되어 자신도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고 군복을 벗은 후 스스로 그들과 함께 섰다. 다시 40명이 채워졌고 이들 모두는 그날 강에서 얼어 죽었다.  이 역사적 실화를 통해 우리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순교의 길로 가게 했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성자 세바스찬의 순교와 40명의 병사들이 믿음을 지키며 호수의 얼음위에서 동사한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러한 초기 기독교의 핍박은 로마 제국 내에서 25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지만 그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이처럼 기독교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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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로마제국의 갈등 기독교가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기독교의 평등과 자유, 천부적 인권에 대한 본질적 가르침은 신분제 로마사회와 충돌함으로써 반사회적인 기관으로 인식되었다.  둘째, 기독교의 유일신관은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에게는 무신론자로 비쳐져 처형되었다. 가뭄이 들었을 때는 ‘농사의 신’ 새턴에게 제사했고, 병력을 움직일 때는 ‘전쟁의 신’ 마르스에게 제물을 바쳤으며 결혼할 때는 사랑의 신 비너스에게 행복을 빌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이방 신들을 부정하는 것은 로마전통과 사회적 안녕을 원치 않는 것처럼 오해되었다.  셋째, 황제숭배를 거부한 것이다. 황제들은 자신들을 위한 신전을 짓고 제사를 요구하였으며 황제를 신격의 호칭인 ‘주(Dominus / 도미누스)’로 부르게 함으로써 기독교인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에게는 황제를 신으로 추가해서 믿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수용할 수 없었다.  넷째 기독교에 대한 오해, 즉 성만찬과 세례에 대한 오해였다.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성찬식은 식인종교로 오해케 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는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A.D112년경 소아시아 북서지역인 비두니아의 총독 플리니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제국 전역에 뿌리를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핍박이 발생하면 기독교인들은 각 도시의 외곽 “지하무덤”이었던 카타콤으로 피신하였다. 수도 로마의 카타콤은 전체 지하길이가 40km가 넘는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순교로 죽음을 맞이한 날은 하늘나라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제 2의 생일’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순교를 패배가 아닌 승리로 간주하고 이교도들처럼 검은 옷을 입고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언제나 흰옷을 입고 죽은 이들을 기쁨으로 환송하였다. 3세기의 교부 터툴리아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를 논할 때 순교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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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 후 40일의 의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르셨다. 40일 동안 머무르시며 하셨던 일들은 공생애 기간 때처럼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시고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닌 제자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일에 집중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3년 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것을 다시 일깨우며 총 복습의 시간을 가지신 것이다. 마치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친 것을 수업을 마치는 시간 즈음에 중요한 부분을 다시 나열하며 총 복습의 시간을 갖는 것처럼 예수님도 40일간의 기간 동안 제자들과 그러한 시간을 가지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속 머물 수 있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일들은 이제 제자들에게 위임되어 제자들이 그 주체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십자가 대속사건 이전의 몸과 부활 후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시며 신비한 하늘의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셨다.  예수님의 몸은 분명 그들이 보기에도 신비한 몸이었다. 문을 굳게 닫고 있는데도 출입문을 통하지 않고 그들에게 찾아오시어 함께 음식을 드시며 대화를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었던 못 자국이 있었고 허리에는 창 자국이 있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신비한 몸을 보면서 이 땅에 대한 소망을 갖기보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40일의 기간이 찼을 때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다. “오직 성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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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거처 아프리카에서 30년간 선교사역을 마치고 은퇴한 후 배를 타고 뉴욕 항으로 돌아오는 선교사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배에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열흘간 아프리카에서 사냥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뉴욕 항에 도착하자 항구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귀국 환영식이 성대하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빌'이라는 선교사는 너무나 부러운 나머지 그의 아내에게 약간의 불만이 섞인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고국을 떠나 10일간 사냥을 하다가 돌아오는 대통령을 위해서도 저렇게 성대한 환영식을 베푸는데 30년씩이나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돌아오는 우리에게는 그 어느 한 사람도 우릴 맞아 주질 않으니..."  이 말을 들은 아내는 남편에게 말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예요? 방금 한 말, 정말로 당신이 진심으로 한 말이예요? 이상한 말 그만하고 어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세요“ 그는 아내의 말을 듣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이 내 뱉은 말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아내가 남편에게 말합니다. "여보, 하나님이 당신에게 응답하셨어요?" 남편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달리 밝아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소” '루즈벨트가 그렇게 성대한 환영식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너는 아직 너의 집에 돌아온 것이 아니지 않느냐. 네가 너의 집으로 돌아 올 때는 정말로 큰 환영식을 준비해서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본향이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인생들은 모두가 고향을 찾아가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그네의 삶은 고단하고 피곤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쉼이 없습니다. 비록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주막에 들러 밥을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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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관심사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끊임없이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다. 12제자들을 택하신 목적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을 삶을 통해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시며 삶의 롤모델이 되어 주셨다.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자들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병든 자는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시며 몸소 낮은 자의 삶을 실천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의중도 파악하지 못한 채 예수님의 근심이 되었다.  제자들의 이러한 삶의 마인드는 급기야 사마리아 성에 이르렀을 때 표출되기에 이른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영접하지 않음으로 인해 화가 치민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예수님! 저들이 우리를 영접하지 않는데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다 태워서 죽일까요?” 참으로 과격하고 무서운 말이다. 전혀 예수님의 제자답지 못한 말임에 틀림없다. 이런 말을 들으신 주님의 마음은 아마도 제자들의 철없는 행동에 가슴이 내려앉았을 것이 분명하다.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철없는 행동을 보이게 될 때 부모의 마음이 답답함을 느끼는 것처럼 아마 우리 예수님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끊임없이 삶을 통해 보여주셨지만 그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십자가를 지고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제자들은 누가 큰 사람인지 경쟁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언젠가는 그들이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될 것을 믿고 있었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다 대속하신 예수님은 평소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대로 3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리고 40일 동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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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의 사역자2 성경(잠언)은 이에 대해 “내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주시리라” 기드온은 에브라임지파가 잘못되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갚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이 직접 갚아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어리석음을 행치 않기를 바란다. 잠언9:7-9은 거만한 자를 징계하거나 책망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왜냐하면 거만한자는 결코 지혜자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지혜자가 거만한 자로부터 흠이 잡히고 미워함을 당할 것이라 경계한다. “미려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23:9)”반면 성경의 말씀(특히 잠언, 레위기, 신명기)에 순종해서 위기를 잘 극복한 사람도 등장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대표적인 사람이 5번째 사사였던 기드온이다. 기드온은 입다와는 달리 처음 사사로 부르심을 받을 때부터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다(삿6:15). 그래서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사사로 부름을 받아 대승을 거두었을 때도 결코 그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돌렸다.  뿐만 아니라 이때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시비를 걸게 될 때 기드온은 그들 앞에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미덕을 발휘한다. 얼마든지 그들과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기드온은 칼날을 결코 자신의 동족에게로 돌리지 않았다.  이처럼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쓰임 받는 사람 중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입다처럼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함부로 힘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드온처럼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내 자신은 현재 어떤 부류의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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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의 사역자 1. 옛날에 고집 센 사람과 똑똑한 사람이 한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둘이 크게 다투었다. 그런데 원인을 알고 보니 특별한게 아니었다. 두 사람이 곱셈을 하다가 고집 센 사람이 2x8=17 이라고 하자 똑똑한 사람이 2x8=16 이라고 맞받아 쳤던 것이다.  서로가 옳다고 한참을 다투다 결국 똑똑한 사람이 마을 사또에게 가서 판결을 받자고 제안을 했다. 이에 두 사람은 사또를 찾아가 시비를 가려줄 것을 요청했다. 사또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 듣고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더니 먼저 고집 센 사람에게 말했다. “네가 2x8=17이라 했느냐?" "그러하옵니다.  당연한 사실을 말했는데 글쎄 이 녀석이 2x8=16 이라고 우기지 뭡니까?" 그러자 사또가 말했다. "17이라고 말 한 자는 풀어주고 16이라고 말 한 사람에게는 곤장 열대를 때려라!" 이에 고집 센 사람은 의기양양하게 똑똑한 사람을 흘낏 보더니 자리를 떠났다. 똑똑한 사람은 어이없게도 곤장을 맞아야 했다. 그래서 매를 맞으면서도 억울하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사또가 말했다. 2x8=17 이라 말하는 자와 싸운 네가 더 어리석다. 내 너를 매우 쳐서 지혜를 깨우치려 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어리석은 자와의 다툼이 얼마나 미련한 행위인지를 일깨워 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믿음이 좋고 재능이 있으며 지혜가 많은 능력자 일수록 하나님의 사람들은 겸손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죽고 나서 등장한 12명의 사사가운데 8번째 사사인 입다를 보라.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삿7:1)” 이처럼 입다는 큰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콤플렉스가 있었다. 서자출신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보니 본처의 자식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 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입다를 집에서 쫒아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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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능력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인생들을 깨우치시기에 바쁘셨다. 밤이 새도록 고기 한 마리 못 잡은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두 배에 고기를 잡아서 채우는 기적을 경험케 하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순종한 것이다. “우리가 밤이 새도록 수고하여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주님은 곧 이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주님은 이 세상의 것에 주목하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베드로에게 하늘의 세계에는 이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무궁무진한 것이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 베드로에게 두 배에 고기를 채우는 경험을 하게 하신 것이다.  근처에 있었던 요한과 야고보도 베드로가 잡은 고기를 자신의 배에 가득 채우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십 수 년 동안 어부생활을 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곧 예수님에게 이미 생사화복의 모든 해답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분을 붙드는 자가 복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종할 때 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앞을 보지 못했던 맹인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을 때 비로소 능력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여리고성 역시 하루에 한 바퀴씩,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 때 성이 무너져 내렸고 아람의 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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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의 유래와 의미 유월절은 모세를 통해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이 발단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로소 400년 동안 노예생활에서 탈출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명절)이다.  유월절은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10번째 재앙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그것은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재앙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사람의 장자뿐만 아니라 짐승의 첫 것(수컷)까지 다 죽임을 당하는 재앙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장자는 죽임을 당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문설주에 양(염소)의 피를 발랐기 때문이다. 양의 피를 발랐다는 의미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사람들과의 구분을 천사들이 잘 못할까봐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양의 피를 바른다는 의미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모든 첫 것(수컷)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에서 출발한다(출13:11-16/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은 것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첫 것(장자)을 반드시 하나님께 바쳐야만 한다. 애굽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것은 곧 첫 것(장자)을 짐승이든 사람이든 죽여서 번제단에 올려 번제로 태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방법을 원칙대로 적용하지 않으시고 장자(첫 것)를 죽여서 번제단에 올려 태우는 대신에 양을 잡아서 죽이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첫 것을 바친 것으로 인정하셨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을 잡아서 집집마다 양(염소)의 피를 바름으로 첫 것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다.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이지만 만약에 애굽 사람 중에서 혹 하나님이 두려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똑 같이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다면 그 집은 반드시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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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개관 신명기는 육적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마치고 모압 평지에 도착하여 여호수아를 통해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에 모세가 남긴 일종의 유언장이라 할 수 있다.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 가나안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는 못하고 신명기라는 유언장을 남기고 죽는다. 그리고 바통이 여호수아에게 넘겨진다. 그러므로 신명기는 모세가 죽기직전에 선포한 마지막 말씀이다.  그런데 신명기에 기록된 십계명을 비롯한 기타 여러 말씀을 들었던 대상은 출애굽 1세대가 아닌 2세대이다. 그 이유는 애굽에서 나올 때 20세 이상은 광야40년 여정 속에서 여호수아 갈렙 외에는 다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2정탐꾼을 가나안땅에 보냈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다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바람에 20세이상 장정은 광야 40년동안 광야에서 다 죽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말씀을 듣고 있는 대상은 애굽에서 나올 때 19세 이하였거나 아니면 광야여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선포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그들 중에는 그 당시 비록 장정은 아니었지만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이나 홍해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그 당시 19세 된 청소년들은 홍해의 기적을 경험했지만 그들은 20세가 되지 않았으므로 광야 40년에도 살아남았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 최고로 나이가 든 사람은 59세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듣는 사람과 신명기 5장에 있는 십계명을 듣는 대상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십계명을 듣고 있는 대상은 출애굽 1세대이고 신명기5장은 그들의 후손 출애굽 2세대이다. 모세는 출애굽 2세대를 향하여 다시 한 번 십계명을 선포한다.  출애굽 1세대가 말씀을 지키지 못해서 광야에서 엎드러졌기 때문에 출애굽 2세대만큼은 하나님의 십계명을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순종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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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4장을 통해 살펴본 레위인의 직무 민수기 4장은 성막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의 사명이 무엇인지 다루고 있다. 레위는 야곱의 3번째 아들로서 오로지 성막에서 봉사하는 직무만 맏았다. 반면 나머지 11개 지파는 전쟁에 나가는 임무가 주어졌다. 레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게르손’, ‘고핫’, ‘므라리’이다. 그렇다면 모세와 아론은 레위지파로서 어느 족보에 해당되는지 알아야 한다. 모세와 아론(모세의 형)의 아버지는 아므람이고(민3:27, 출6:18-20참조). 아므람의 아버지가 고핫이다. 그러니까 모세는 고핫 자손에 해당된다.  그러고 보면 고핫 자손 중에서 모세가 나왔고 아론이 나왔다. 그리고 모세의 형 아론은 제사장이 되었다. 아론의 자손을 제외한 나머지 고핫 자손들은 30-50세 때까지 성막 안에 있는 기구들(언약궤, 촛대, 진설병, 번제단 등 )을 행군시에 옮기고 도착해서는 원래대로 설치하는 일을 맡았다.  이 때 이것을 옮기고 설치하는 일에 실수하지 않도록 철거부터 포장하는 일, 그리고 옮기고 설치하는 일까지 일일이 관리 감독하는 사람들이 제사장이었던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었다.  왜냐하면 성막의 모든 기물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기에 함부로 다루면 죽기 때문이었다(민4:20). 그렇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섬기고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보자. 혹여 하나님을 불경건한 자세로 섬기고 있지는 않은가? 게르손 자손들에게는 주로 성막의 휘장(울타리 휘장, 성소와 지성소의 덮개 등) 등을 걷어 옮기는 일이 주어졌다.  마지막으로 므라리 자손들에게는 성막의 말뚝이나 널판과 같은 것을 옮기는 일이 주어졌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핫 자손들의 경우 기물들이 아무리 무거워도 어깨에 메고 옮긴 반면 게르손, 므라리 자손들은 수레에 싣고 옮겼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무게가 워나 무거워서 수레가 주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민수기 4장 34-49절까지는 이러한 사명을 감당할 레위인들의 나이와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이처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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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압을 통해서 바라본 교만의 종착지 다윗의 왕국이 든든히 서는데 있어서 꼭 거론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을 꼽으라고 했을 때 다윗의 조카이자 장수였던 요압(이복누이의 아들)을 들 수 있다. 그런데도 요압은 삼하 23장에 다윗의 왕국에 일조한 많은 인물들 속에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압의 아우 아비새, 요압의 아우 아사헬은 등장해도 요압이 다윗 왕국에 공헌한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요압의 병기든 자로 소개된 나하래는 등장하지만 정작 요압 자신은 명단에 올라가 있지 않은 점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삼하 3장 39절에서 다윗은 요압을 계륵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는 장면이 등장한다.“내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그 당시에 다윗은 사울 왕이 죽고 나서 헤브론에서 유다지파의 왕으로만 등극 했을 뿐 아직 이스라엘 전체지파를 다스리는 왕은 아니었다.  즉, 사울이 전사하고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2년 동안 통치하며 유다지파의 다윗과 대립하는 관계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때 요압의 동생이었던 아사헬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이스보셋의 군사령관이었던 아브넬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는 일이 발생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한 때 다윗의 적이자 요압의 적이었던 아브넬이 이스보셋을 배신하고 다윗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되는데 이때 투항하고 돌아가는 아브넬을 요압이 불러서 몰래 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실을 다윗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며 요압이 개인적인 복수심에 불타서 아브넬을 살해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 일로 인해 전쟁을 통하지 않고 유다지파와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를 하나로 묶어 하나님의 거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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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를 통해서 바라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민수기의 배경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도착하여 약1년 정도 머물면서 모세가 십계명을 비롯하여 각종 율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성막을 지어서 각종 제사제도(속죄제, 번제, 화목제, 소제, 속건제)가 만들어지게 된데서 기인한다.  애굽에서 시내산까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과 삶을 민간인의 신분이라고 표현했을 때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성막이 만들어진 이후의 삶은 군인의 신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 출애굽하여 시내산에 올 때까지는 행군할 때 각 지파별로 특별한 위치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마치 민간인처럼, 아니면 예비군처럼 주머니에 손도 집어넣고 군복도 풀어 헤치고 모자도 삐뚤어지게 쓰고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무리를 이루어 모세의 뒤를 따라 나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내산에 와서 십계명을 받고 성막이 만들어지고 나서는 더 이상 과거의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율법이 수여되고 나서부터는 신분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민간인에서 군인의 신분으로 바뀐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그렇다보니 십계명을 받고 성막이 만들어진 이후에는 가나안땅을 향하여 행군할 때 유다지파를 선두로 하여 각 지파별로 정해진 위치에 따라서 줄을 지어서 이동했다. 그리고 행군도중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머무는 곳에 진(막사)을 쳤는데 이때도 하나님께서 각 지파별로 정해준 위치가 있었다. 성막이 맨 가운데 있고 성막 주위로 제사장을 비롯한 성막에서 봉사하는 레위지파가 진을 쳤다. 그리고 그 둘레에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진을 쳤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과거에 예수님을 믿기 전에 행했던 모든 잘못된 습관들은 이제 하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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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9장을 통해서 바라본 예례미야 이해3 예례미야 선지자에게 대항한 거짓선지자 아합, 시드기야, 스마야는 철저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해치고 성령을 해방하는 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잠잠했다면 예레미야 선지자의 메시지는 백성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이고 그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문을 바벨론 군대에게 항복의 표시로 열어줄 수 있었기에 더 이상 예루살렘에는 바벨론 군대에 의한 살육이 일어나지 않고 성전도 불타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히 예레미야를 포함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언제나 강단을 통해서 외쳐진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강단에서 나오는 메시지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강단의 메시지를 사람의 말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이미 그 사람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울 왕이 망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 사무엘 선지자의 말을 사람의 말로 받은데 있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무엘 선지자 개인의 말로 받았던 것이다. 우리는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후에 자신의 죄를 지적하러 보낸 나단 선지자 앞에 무릎을 꿇은 것처럼 언제나 그 말씀 앞에 꿇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고 심지어 놉의 제사장들을 85명이나 죽이고 그의 가족들까지 죽이는 악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끝까지 사울을 살려둔 것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사울에게 임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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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9장을 통해서 바라본 예례미야 이해2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그 당대의 백성들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할례 받지 않은 이방 민족 바벨론을 대항해서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더 달콤했고 현실적이었다.  그들의 메시지 중에는 2년 내에 바벨론 포로지에 있는 포로민들을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본국으로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보니 예레미야가 바벨론 땅에서 70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포로생활을 견디라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바벨론 땅에서의 죽음을 의미했기에 더 이상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인 반면 2년 내에 회복된다고 하는 스마야의 메시지는 그들에게 희망찬 메시지로서 강렬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리한 현실 속에서 예레미야는 스마야와 같은 거짓 선지자와 점쟁이들의 말을 절대 믿지 말 것과 혹여나 자신의 신령한 꿈도 믿지 말라고 거듭 당부한다(렘29:8).  그리고 비록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와서 예전처럼 예루살렘에서 번제와 화목제와 같은 각종 제사를 드릴 수 없지만 바벨론 땅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렘29:12-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내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받지 않음으로 인해 렘29:17-23 말씀이 남 왕국 유다의 예루살렘에 응하여 바벨론 군대에 의해 철저히 응징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거짓 선지자였던 아합과 시드기야도 백성들을 선동한 죄로 느부갓네살에 의해 화형을 당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그들의 죽임 당함은 저주받은 자의 상징으로 이스라엘 사회에서 하나의 속담으로 남게 된다.  거짓 선지자 스마야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백성들을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한 죄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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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9장을 통해서 바라본 예례미야 이해1 예레미야 29장은 바벨론의 2차 침략 때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갔던 포로민들을 대상으로(여고니야 왕을 포함한 엘리트 계층들이 끌려갔다. 이때 에스겔 선지자도 끌려갔다) 예례미야가 편지로 보낸 하나님의 말씀이다. 메시지의 핵심은 거기가(바벨론 땅) 예루살렘과 같은 제 2의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결혼을 하고 자식을 놓으며 그곳에서 70년 동안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보태 바벨론제국의 안녕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었다(7절). 그 이유는 바벨론제국이 평안해야 비록 포로생활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도 평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예레미야의 서신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바벨론 포로지에 있는 백성들이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적국인 바벨론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거짓 선지자 스마야 때문이었다.  예례미야가 살고 있는 그 당대에 예루살렘과 바벨론 포로지에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대표적인 거짓 선지자가 하나냐라고 했을 때 바벨론 포로지에는 아합과 시드기야(이들은 도덕적으로도 타락했다. 렘29:23 참조) 그리고 스마야가 있었다.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이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거절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당대에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민족의 배신자, 매국노로 여겨졌는데 그 이유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올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문을 열어주고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렘27:5-11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을 하나님의 종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그 당대에 자신의 민족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예레미야의 서신을 바벨론 땅에서 받은 거짓 선지자 스마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들을 선동 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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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교회의 쇠락 원인 오늘날 유럽교회가 문을 닫고 술집으로, 관광 상품을 파는 가게로 전락한지 이미 오래이다. 그나마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사람은 젊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고 몇 백명, 몇 천명씩 앉아서 예배를 드렸던 교회당에는 연세가 지긋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유럽교회가 이렇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해봤을 때 신학자 벨하우젠의 ‘문서설’이라는 잘못된 신학이 교회를 병들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전통적인 신학을 버리고 ‘문서설’을 새로운 신학이라고 하여 교회 안에 무분별하게 수용한 결과가 교회를 병들게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회가 무슨 생명력이 있을 수 있을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의 신앙고백위에 주님은 교회를 세울 것이라 했는데 그러한 신앙고백이 없는 유럽교회가 어떻게 든든히 설수 있다는 말인가? 어쩌면 유럽의 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 접근하다보니 성경의 초자연적인 계시는 그들에게 허구로 다가왔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셨던 사건이나 오병이어의 기적, 모세의 홍해의 기적이 그들에게 있어서 다 거짓말(허구)로 여겨지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수 있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도 믿음이 생긴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한국교회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교회와 신학교에까지 깊숙이 들어온 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는 일이 그들 자신도 모르게 교회를 죽이고 병들게 하는 신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어느 종교에서도 자기의 경전을 폄하하거나 평가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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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홍수이야기 성경을 읽다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참 많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여 짐승들을 방주에 태우라는 명령을 내리는 부분도 해당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이 같은 본문 안에서도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창7:1-2에는 암수 일곱씩과 암수 둘씩 방주에 태우라고 하는 반면에 7:9에는 암두 둘씩 들어가 있다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성경에 모순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7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6장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6장 1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암수 한 쌍 씩 방주에 태우라고 명령하신다.  이렇게 한 쌍을 방주에 태우라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어라고 한 시점이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7장에서 내려진 명령은 방주가 다 지어진 후에 홍수가 나기 7일전에 내려진 명령으로서 방주를 짓기 전에 하셨던 명령을 아주 구체화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7:2-3에 나타난 정결한 짐승 암수 일곱씩(7쌍)과 부정한 짐승 암수 둘씩(2쌍)은 홍수가 임하기전에 내려졌던 구체적인 명령이었던 것이다. 마치 우리가 어떤 일을 누군가에게 시키게 될 때 처음에는 큰 밑그림만 설명해주다가 그 일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시점에 가서는 조목조목 세밀하게 설명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러나 7:9절에 나타난 암수 둘씩이라는 표현은 2쌍의 개념이 아닌 1쌍의 개념으로서 암수 각각 한 마리로 보는 것이 문맥상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7:9은 6:19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한 것을 근거로 노아가 성실히 이행했다는 측면에서 암수 둘씩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7:2-3절에 나타난 암수 둘씩(2쌍)의 개념과 7:9에 등장하는 암수 둘씩(1쌍)의 개념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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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사람 2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노예상인들에게 은20을 받고 팔아넘긴다. 그런데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고 억울하게 노예로 끌려왔지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비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고 다른 노예들과는 달리 늘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다. 요셉의 성실함은 급기야 보디발에게까지 알려지게 되고 보디발이 가장 신임하는 노예가 되어 가정총무가 된다. 보디발에게는 요셉처럼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노예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비록 노예였지만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의 일을 감당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요셉의 이러한 성향은 애굽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요셉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불의를 보지 못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성실함이 몸에 배어있었다.  그렇다보니 형들이 어떤 잘못을 하게 될 때 그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요셉이 고자질 하는 나쁜 성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성향을 대변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형들이 나쁜 행동을 하게 될 때 그 잘못된 행동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 야곱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요셉은 아버지에게 말한 것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상대의 허물을 고자질 하고 흉보는 것과는 다른 관점에서 요셉을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아 그것이 발단이 되어 감옥에 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감옥에 간 것이 오히려 요셉에게는 복이 되었다. 거기서 떡 굽는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하는 사건으로 이년 후 바로의 꿈을 해몽함으로써 애굽의 총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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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사람 1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우리에게 믿음의 귀감이 되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중에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어린아이로부터 성년에 이르기까지 친숙하게 다가온다.  특히 성년에게 있어서 요셉의 이야기는 많은 감동을 주는데 그 이유는 요셉이 절망 가운데서도 꿈을 잃지 않은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셉은 이삭의 손자로서 야곱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 시작은 형들의 잘못을 요셉이 볼 때마다 아버지 야곱에게 일렀기 때문이었는데 요셉의 이러한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꾼 꿈을 자랑하게 된 것이다.  첫 번째 꿈은 형들의 곡식단과 동생 베냐민의 곡식단이 야곱의 곡식단에게 와서 절하는 꿈이었고 또 다른 꿈은 해와 달과 열한별이 요셉의 별에게 절하는 꿈이었다. 결국 이러한 꿈 자랑은 급기야 형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어느 날 야곱은 요셉에게 심부름을 보낸다.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이 잘 있는지 보고 오라는 심부름이었다. 이에 요셉은 아버지의 명을 받들고 세겜으로 갔다. 그런데 세겜에 도착해서 보니 형들이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 물어 형들의 위치를 추적하여 세겜에서 약 30-40km정도 떨어진 도단에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까지 찾아가게 된다.  이것은 요셉의 성실함과 책임감을 볼 수 있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요셉이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결코 거기까지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야곱이 살고 있는 헤브론에서 세겜까지는 약90km 거리나 떨어져 있었다. 17세 소년이었던 요셉에게 있어서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고대 사회에 도보로 여행을 한다고 하는 것은 늘 위험을 동반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세겜까지 갔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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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사건 속에 담겨진 의미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사건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요21:25)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기적사건들이 복음서에 기록된 것 외에도 더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기적사건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예수님의 기적사건 하나 하나에는 사실 여러 가지 의미가 그 속에 담겨있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장정기준으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들은 한 마디로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에서 출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기적사건은 또 다른 의미가 그 속에 담겨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그 당대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우물 안에 살고 있는 개구리와 같아서 우물 밖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우물 밖의 소식을 알게 하는 방법은 그들 스스로가 우물 안에서 탈출하거나 아니면 우물 밖의 개구리가 와서 바깥세계를 알려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주님은 우물 안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인생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영원한 세계에서 인생들에게 찾아오신 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기적이 상식처럼 되어 있는 병 고침과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행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본 인생들은 깜짝 놀랐지만 주님은 전혀 놀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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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하란 도피의 의미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난 아들이다. 에서가 장자라고 했을 때 야곱은 차자이다.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장자는 아버지 유산의 두 몫을 받을 수 있으며 아버지의 축복권을 이어받아서 전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축복권은 전적으로 장자인 에서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에서는 하나님께로 부여된 이러한 장자의 권한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결과 장자권은 팥죽 한 그릇 값에 야곱에게 넘어 가게 된다. 야곱은 이 일로 인해 형 에서와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을 겪게 되고 결국은 에서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 이삭의 곁을 떠나 머나 먼 이국땅인 외삼촌 집으로 도망가서 살게 된다.  야곱은 거기서 20년 동안 외삼촌의 양을 치며 4명의 아내를 얻게 된다. 그들을 통해 11명의 아들이 태어나고 막내아들 베냐민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남으로써 그들이 훗날 12지파를 이루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야곱을 하란 땅으로 보내셨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 할 수 있다.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면 형 에서와의 갈등의 문제가 야곱을 하란 땅으로 보낸 것 같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을 성취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가나안땅이 아닌 하란 땅을 택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택하지 않고 하란 땅을 택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가나안 땅은 이미 죄악으로 붉게 물든 땅이었기에 하나님은 야곱의 경건한 후손을 이곳에 있는 여인을 통해서 얻기 원하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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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명(서로 사랑하라)을 주신 이유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즉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나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닦아 주신 후에 주신 계명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엄밀히 말해 새로운 계명은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 모세를 통해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이미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이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8)”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구약에 이미 있었던 계명을 새로운 계명이라고 하시면서 주셨을까? 그것은 예수님 당시에 구약의 말씀이 실천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레위기를 통해서 이미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선포되었으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대에 이르기까지 이 말씀은 삶속에 실천되지 않았던 무용지물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그것을 취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에게는 여전히 새로운 것이 되는 이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요즘 새로운 영화가 극장마다 쏟아져 나오는데 영화를 즐겨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과거에 이미 상영된 영화도 새로운 영화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봤을 때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계명은 구약에 이미 있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계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이 그토록 중요할까? 그것은 사랑만이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새롭게 만들어질 ‘하늘의 거록한 공동체(교회)’를 존속 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잠시 잠깐후면 주님을 배신할 제자들이었지만 제자들의 발을 닦으시면서까지 끝까지 사랑하셨던 것이었다. 여기에는 주님을 3번씩이나 부인할 베드로도 있었고 은 30에 예수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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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칭찬 하신 믿음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계실 때에 로마의 한 백부장으로부터 자신의 종이 중풍병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고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흔쾌히 백부장의 집으로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한다. 백부장이 그렇게 말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까지 와서 기도해 주지 않아도 예수님은 만왕의 왕의 아들이시기에 현재 이 자리에서 말씀만 한 마디 해주시면 병이 깨끗하게 낫게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에 예수님은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그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어떤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셨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는데 첫째는, 예수님께서 직접 백부장의 집에 방문하지 않아도 말씀만으로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칭찬이었다. 다시 말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의 직접적인 손길을 기대할 때 백부장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재적 자리에서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병이 고침을 받게 될 거라는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두 번째는 종을 불쌍히 여기는 백부장의 인자한 마음에 대한 칭찬이었다.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은 자신의 아들이나 딸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노예를 고쳐달라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 당대에 노예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노예는 철저히 물건의 소모품처럼 여겨지는 시대였기에 노예가 잘못을 하였거나 실수를 했을 때 주인이 마음 내키는 대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시대였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백부장은 자신의 노예를 자신의 몸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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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바리새인인가?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메시야 된 증거로 많은 기적과 이적을 나타내셨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그 외에도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치셨다. 뿐만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하셨다. 그래서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또는 메시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러한 기적과 이적을 목격한 사람들 중에 바리새인들은 군중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다양한 기적과 이적을 보면서도 귀신의 왕 바울세불을 힘입어 쫓아낸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더욱 확실한 표적을 구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동안 일으켰던 병 고침과 같은 표적이 아닌, 하늘로부터 오는 고차원의 다른 표적이었다(눅11:16).  예를 들면,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대결을 할 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번제단의 장작과 송아지를 불태웠던 것과 같은 유사한 표적을 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그동안 행하셨던 이적과 기적만으로도 메시야라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했기에 더 이상의 기적과 이적은 필요치 않다는 것이었다.  혹 그들의 요구대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기적을 베푼다 할지라도 그들의 강팍함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지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더 이상의 표적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요나가 밤낮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못박히심으로 죄를 대속하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에 대한 표적을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현재 영적 모습을 살펴보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영적 바리새인이 될 수 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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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복 있는 사람인가? 이 세상 사람들은 물질, 장수, 건강, 명예, 권세와 같은 외형적인 것을 많이 가질수록 복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것을 복의 본질로 보지 않는다. 물론 구약성경에서 물질의 축복(가축의 많음)과 장수를 복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복의 한 부분일 뿐 결코 복의 본질은 될 수 없다는데 있다. 그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영원성이 결여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철저히 복을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시켜 영속성을 지니게 될 때 그것을 비로소 복으로 이해한다. 시편 1편에서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으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진리는 복이 하늘로부터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닌 철저히 개인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복은 내가 삶속에서 어떻게 처신을 하느냐에 따라서 복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시편에서 사용하고 있는 복은 히브리어로 ‘에쉐르’라는 단어와 연관시켜 복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에쉐르’의 의미는 철저히 개인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고 하겠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은 복의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의 키(열쇠)는 철저히 개인이 쥐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을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말씀이 삶의 등불이 되기에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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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에 처음으로 찾아가 복음을 전하신 지역이 갈리리 주변의 마을들이었다. 마태복음 4장 14절에는 그곳을 좀 더 구체적으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표현하면서 그 지역을 일컬어 ‘이방의 갈릴리’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변두리 지역으로서 로마를 대항하여 늘 폭동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으로 유명하다. 기록에 의하면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던 헤롯 대왕 때에 만 번 이상의 폭동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보니 일반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기피 대상 지역이었고 로마인들에게 있어서도 늘 골치 아픈 지역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이 바로 이방인 취급을 당했던 그곳에서 시작되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자라나신 나사렛 역시 로마를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키는 지역의 영향권 아래에 놓여 있었기에 유대인들의 부정적인 시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렇다보니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의 질병을 치유하는 역사를 펼치시게 될 때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메시야가 로마를 대항하여 늘 폭동이나 일삼는 갈릴리 마을에서 결코 나올 리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귀신의 왕 바울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쫒아내고 병을 고친다고 믿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말에 개의치 않으시고 갈릴리 주변의 마을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셨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의 성취라 할 수 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들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예수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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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하늘빛교회에 주신 사명과 비전 지난 2016년을 돌아보면 그 어느 해보다 사회적으로 많은 어려운 일들이 있었던 해였습니다. 사회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곧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세계정세로 비추어 볼 때 앞으로도 어려움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새해에도 주님의 뜻을 이루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있고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명자는 어떤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세상과 타협하는 자가 아닌,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끝까지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승리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을 누리며 편히 살다가 오라고 부르신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주님의 제자로서 이 땅에 아무런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죄의 자리에서 구원하고 더 나아가 그들을 또 주님의 제자 삼아 세상에 파송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늘빛 교회의 2017년 표어는 작년과 동일한 “전인적 소그룹 안에서 모든 성도가 제자 삼는 교회(마28:19-20)”로 정하고 2017년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합니다. 2016년이 소그룹(목장)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좌충우돌한 한 해였다고 했을 때 2017년은 각 소그룹(목장)이 안정적으로 정착될 수 있는 한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2016년은 마치 개구리가 멀리 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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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하늘빛교회에 주신 사명과 비전 2015년은 이제 과거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회상하며 못내 아쉬워합니다. 더 열심히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더 참지 못한 것에 대해서, 더 사랑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더 열심히 교회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 외 기타 등등의 사유로 마음 아파합니다. 그러나 과거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살뿐이기 때문입니다. 현재가 싫다고 해서 과거로 되돌아가거나 현재의 삶을 건너뛰고 미래로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삶에 더 이상 후회가 없기 위해서는 현재의 삶이 중요합니다. 2016년 하나님께서 우리하늘빛교회에 주신 표어는 ‘전인적 소그룹 안에서 모든 성도가 제자 삼는 교회’입니다. 지난 2015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표어는 ‘가서 제자 삼으라“였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표어를 온전히 삶 속에 실천하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아쉬움이 많은 한 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늘빛교회에 열매를 주신 한 해였습니다. 새롭게 밝아온 2016년에는 모든 성도가 소그룹안(목장)에서 제자 삼는 한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2016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릴 때는 후회 없는 한해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행사와 목장 모임의 초점도 철저히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그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들을 제자를 삼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입니다. 목장 모임의 경우 일명 ’우리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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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제도의 기원과 의미 제사제도는 아담과 하와가 이 세상으로 쫓겨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제도이다. 마치 부모가 어린아이의 목이나 팔에 인식표를 만들어 목에 걸거나 팔찌로 만들어 걸어 주는 것처럼 제사제도는 인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근본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르쳐주신 제도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제사제도는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회복을 위해 제시된 제도이기도 하다. 성경에 나타난 제사제도의 첫 모습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이다. 그리고 그 후 노아의 제사, 아브라함의 제사가 등장하면서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공식적으로 성막제사법이 수여되기까지 제사법은 에덴에서 쫒겨난 인류와 함께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사제도는 인류의 조상이었던 아담과 하와로부터 기원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성경에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인류의 첫 제사의 모습이지만 실상은 아담과 하와가 먼저 하나님께 제사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가인과 아벨에게 제사법을 알려준 사람이 그들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제사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다. 제사제도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 그리고 죄인과 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복원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더 나아가 죄로 오염된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 정결함을 얻게 하는 방안으로 제시된다. 그러다가 훗날 모세 시대에 가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간의 관계회복을 위해서 이러한 제사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즉 제사 제도의 일차적 목표는 이스라엘에게 출애굽의 자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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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그리스도인 룻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룻과 보아스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룻과 보아스의 사랑 이야기가 아닌 다른 관점에서 룻기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룻기에서는 룻과 보아스가 주연이라고 했을 때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조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주연배우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조연배우의 도움이 필요하듯이 룻기에서도 시어머니 나오미는 조연으로서 룻을 룻 되게 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방여인이었던 룻의 삶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하고 있지 않지만 본문의 정황을 통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두 며느리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는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언제나 불편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등장하는 두 며느리(룻, 오르바)와 시어머니 나오미 사이에는 갈등하는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가 아닌 친정어머니와 딸의 관계 이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가 이렇게 좋다보니 나오미는 룻과 오르바에게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를 자연스럽게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들로 하여금 시집을 오기 전까지 믿었던 이방의 신(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여기서 나오미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룻과 오르바에게 하나님의 사람됨의 모습(향기)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한 집에 살면서도 룻과 오르바는 여전히 우상을 섬기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나오미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올 때도 시어머니를 따라 오지 않고 모압 땅에 남아 재혼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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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타락의 길로 들어서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침묵 느헤미야를 통해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차츰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개혁은 오래가지 못하고 또 다시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마치 기드온과 삼손이 활동했던 사사시대에 이스라엘백성들이 타락→심판→회개→구원→타락의 싸이클이 사사시대가 끝날 때까지 반복적으로 지속되었던 것처럼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 종교개혁이 일어났지만 그 개혁은 지속되지 못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역사의 무대에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퇴장하자 또 다시 과거의 선조들이 그랬던것처럼 잘못된 신앙을 답습하게 된다. 다시 말해 스룹바벨을 통해 성전이 건축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해 종교개혁의 불길이 일어나고 예루살렘 성벽도 재건되었지만 세월이 지나도 그들의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또한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도 임하지 않자 낙담한 나머지 나태한 신앙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말라기 선지자는 제사장의 타락을 경고하며 타락의 결과가 백성들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궁핍하고 고통이 따르는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 주된 원인이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세울 것을 지적하고 있다. 말라기 선지자가 지적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제사장들의 타락과 잘못된 형식적인 예배, 이혼, 간음, 불성실한 십일조와 헌물, 가난한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였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러한 잘못된 행위를 돌이키지 않으면 여호와의 날(심판의 날)이 임할 때에 멸망당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여호와의 날은 바로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의 초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구원과 심판의 양면성이 있게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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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회복(3차 귀환) 에스라의 2차 귀환(기원전458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 부흥을 꾀하고 있을 때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술 맡은 관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본토에서 여전히 이방민족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다시 말해 1차 포로귀환 때 유다총독이었던 스룹바벨을 통해 기원전 515년에 성전은 재건되었으나 에스라의 2차 귀환이 이루어진 시점까지 아직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지 못하고 여전히 고통 중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느헤미야는 이러한 소식을 접하게 되자 바사제국의 고위공직자로서의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벽을 재건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술맡은 관원장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음대로 본국에 돌아올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기도로 준비하는 가운데 왕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게 되고 왕의 허락을 받아 유다 총독의 자격으로서 기원전 445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다(3차 포로귀환). 예루살렘에 돌아온 느헤미야는 3일 만에 아무도 모르게 밤에 예루살렘을 정찰하며 성벽재건을 어떤 방법으로 할지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곧 바로 백성들과 함께 성벽재건에 착수하게 되는데 이때 이방인들의 방해를 받게 된다. 느헤미야는 그러한 방해에도 개의치 않고 성벽 재건을 계속해서 추진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이방인들로부터 살해 위협까지 받게 된다. 이러한 방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포기하지 않고 백성들을 두 개조로 나누어 한 개조는 성벽을 쌓게 하고 나머지 한 개 조는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보초를 서게 하는 전략으로 맞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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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회복(2차 귀환)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의 독려로 완공된 성전을 일컬어 일명 스룹바벨성전이라고 부른다. 1차 귀환 때(B.C. 536) 유대총독의 자격으로 스룹바벨이 책임자로 귀환하게 되었고 그의 지도하에 성전재건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수많은 대적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성전재건을 완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메시야(의미: 기름부음을 받은 자-그리스도)가 성전에 임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게 된다. 왜냐하면 비록 한때 그들이 죄를 지어 하나님께 매를 맞아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면서 죄 값을 치렀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어 주변의 대적자들을 다 물리치고 다윗 왕이 이스라엘을 통치했을 때처럼 나라의 번영을 이루고 이 땅 가운데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메시야는 오지 않았고 실망한 나머지 또 다시 과거의 옛 사람의 삶으로 되돌아가 가고 만다. 즉 제사장들로부터 시작해서 온 백성들이 영적, 육적으로 타락하게 된 것이다. 안식일은 지켜지지 않았고 자기 자신만 잘 먹고 살려고 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마저 율법에 금한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자신의 아들과 딸을 이방인과 혼인시키게 되면서 우상의 문화가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침투하게 된 것이다. 영적으로 암울한 이러한 시기에 바벨론에서 바사의 왕 아닥사스다 밑에서 고위공직자로 일하고 있었던 에스라가 약 5000명을 인솔하여 2차 귀환을 하게 된다(기원전458년). 에스라는 모세 율법에 능통한 학사이자 제사장(모세의 형이었던 아론의 16대손)으로서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제1차 귀환 때(기원전536년)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유대인들이 타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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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회복(1차 귀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하게 되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바벨론 땅에서 70년의 기한을 보내게 된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바사(페르시아)제국을 일으키게 된다. 그 당대에는 바벨론제국이 영원할 것 같았지만 바벨론 제국은 바사의 등장에 의해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마치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앗수르 제국이 영원할 것 같았지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당한 것처럼 바벨론 제국 역시 바사에 의해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B.C.539 바벨론 멸망-기원전539년 멸망) 바사왕 고레스는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바벨론 제국 때 포로로 끌려온 남 왕국 유다 백성들에게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본국(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을 내리게 된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귀환과정은 3번에 걸쳐 귀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1차 귀환 때 돌아온 사람들은 대략 5만 명 정도인데 스룹바벨이 유다의 총독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B.C. 536). 이들의 귀환 목적은 오로지 종교적인 열심에서 비롯된다. 즉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을 때 성전이 불타 없어졌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목적으로 자원해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들은 곧 성전재건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는데 있었다. 오랜 세월동안 바벨론 포로생활로 인해 예루살렘이 비워있는 동안 사마리아인들을 비롯한 많은 이방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성전재건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결집력이 있었기에 성전이 재건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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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예레미야의 사역3 바벨론군대의 3차 침략 때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된다. 그러나 이에 앞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남 왕국 유다에 주신 메시지는 바벨론군대에 대항하지 말고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쳐들어 온 것은 바벨론제국이 임의로 쳐들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마음을 충동시켜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한 목적으로 군대가 쳐들어 왔다는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주된 메시지는 바벨론 군대에 항복하라는 것이었지만 예레미야가 항복을 권하게 될 때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징계를 통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바벨론군대를 통해 남왕국 유다를 징계하겠지만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70년 동안만 참고 바벨론의 지배를 받으면서 바벨론 땅에서 살다보면 70년의 기한이 찼을 때 포로생활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오게 해 줄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바벨론을 대항하여 그들이 싸우게 될 때 전쟁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항복을 권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을 죽이고 심판하는 것이 아닌 그들로 하여금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오게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기에 전쟁으로 인해 그들이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메시지를 버리고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결국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옥에 가두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고 사람들은 무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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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예레미야의 사역2 예레미야의 거듭된 외침에도 불구하고 왕과 지도자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고 성전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있어 결코 이방민족의 군사들이 쳐들어 올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선민사상에 빠져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침략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지킬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하나님 외에도 한때는 적국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든든한 우방의 역할을 하는 애굽이 있기에 바벨론이 쳐들어와도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애굽을 의지하였던 것이다. 이에 예레미야는 애굽이 결코 남 왕국 유다의 보호자가 될 수 없음을 거듭 경고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깨닫게 하기 위해 심판의 매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심판의 매로 바벨론 군대를 일으킨 것이다. 이때 애굽은 한 때 남왕국 유다의 보호자가 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었을 뿐 지속되지 못했다.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처럼 신흥제국이었던 바벨론은 3번에 걸쳐 남 왕국 유다를 침략하여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게 된다. 첫 번째 침략 때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 다니엘을 포함한 그의 친구들이고 두 번째 침략 때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 에스겔 선지자이다. 예레미야 애가의 경우는 세 번째 침략, 즉 예루살렘의 멸망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예레미야 애가(슬픈노래)는 하나님의 매로 사용되었던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참히 예루살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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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예레미야의 사역1 예레미야의 선지자적 사역기간은 대략 주전 약627-587년까지 약40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기간은 남왕국 유다의 20명의 왕들 중에 특별히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긴 16번째 왕 요시야왕의 통치때부터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군대에 의해 불타고 예루살렘 주민들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참히 살육당하고 짓밟힌 때까지 기간에 해당한다(이때 임산부와 젖먹이 아이들도 무참히 살해당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 요시야왕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우상을 몰아내고 종교개혁을 단행한 왕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즉 예레미야가 선지자로서 부름 받았을 당시 종교적 상황은 남 왕국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는 바알과 아세라, 그 외의 많은 이방의 우상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 안에는 우상이 가득했고 심지어 남창(남자창기)의 집(방)까지 있어 그곳에서 성적으로 은밀한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약자와 의인이 살수 없는 세상이었다. 이러한 혼란 한 시기에 요시야왕은 백성들의 무관심으로 퇴락한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라고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명령하게 된다. 바알과 아세라의 신전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람으로 넘쳐나서 그들의 신전은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지만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제대로 제사가 드려지지 않아 지금으로 말하면 재정이 없어서 성전을 보수할 여력조차 없었던 것이다. 왕의 명령을 받든 대제사장 힐기야는 성전을 수리하는 도중에 우연히 하나님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한다(왕하22:1-13, 율법책은 신명기로 추청됨). 율법책은 즉시 요시야왕에게 전달되고 왕은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옷을 찢게 된다. 즉 남왕국 유다가 내적, 외적(앗수르, 애굽의 침략 위협)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옷을 찢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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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소돔과 고모라 사사기 후반부에 해당하는 19장을 통해서 전개되는 스토리(레위인의 첩을 베냐민지파의 기브아 사람들이 집단으로 강간한 사건)는 마치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고 있는 롯에게 두 천사가 방문했을 때의 상황과 거의 흡사하다 이것은 그만큼 사사시대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여호수아가 살아있을 때만 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지만 여호수아가 죽고 나서 이방족속의 문화에 쉽게 물들고 말았던 것이다. 즉 우상을 섬기고 성적타락이 극에 달했던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거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에는 간음하는 자는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는데 한 여인을 집단으로 강간하는 행위를 서슴없이 행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사기 21장 마지막 절에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말씀하면서 사사기를 마무리 한다. 이렇듯 사사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에 각 개인의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간에 연합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호수아 때만 해도 이스라엘은 한 몸처럼 움직였다. 마치 흙을 이기면 찰흙처럼 하나로 잘 뭉쳐졌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고 사사시대가 전개 되면서 더 이상 뭉쳐지지 않는 모래알처럼 되고 말았다(‘너는 너, 나는 나’라는 개념이 강했다). 뿐만 아니라 지파 간에도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2지파가운데 한 지파가 어려움을 겪거나 이민족으로부터 침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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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사사 기드온 여호수아가 죽고 난 이후 사사시대가 전개되는데 총12명의 사사가 등장한다. 그중에 기드온은 5번째 사사로서 기드온이 살았던 시대는 암울하다. 이 때 역시 이스라엘이 미디안족속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나라가 일제 36년 동안 지배를 받으며 고통을 당했던 것처럼 기드온이 살았던 당대 역시 미디안의 압제로 고통을 당하는 시대였다. 그래서 추수를 해도 미디안족속에게 들켜 빼앗길까봐 들에서 마음껏 타작을 할 수 없어 집으로 가져와서 몰래해야만 했다. 이에 대해 사사기 6장 초반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족속들이 두려워 산속에서 굴과 웅덩이를 파고 숨어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그들은 산에 숨어 살면서 평지나 대로로 마음대로 내려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의 삶이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졌는가? 이방민족들(미디안, 블레셋, 암몬, 아말렉 등)은 처음에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이스라엘민족이 두려워 산 속에 숨어서 살았던 존재였다. 그렇다보니 그들은 감히 산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대로로 통행하지도 못했다. 마치 동물의 세계로 비유하자면 이스라엘 민족이 밀림의 왕 사자라고 했을 때 이방민족들은 원숭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고 사사시대로 접어들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오히려 이스라엘백성들이 산속에 숨어서 살고 이방민족들이 큰 소리를 치면서 사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마치 사자가 원숭이에게 쫓겨 다니는 꼴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이 이렇게 반전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결과였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여호수아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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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사람 우리 옛 말에 천석꾼은 땅에서 내고 만석꾼은 하늘에서 낸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큰 부자가 되는 것은 땅과 하늘의 허락이 없이는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지혜로운 말임에 틀림없다.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약한 존재로 등장하지만 그의 나중은 창대한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처음 그의 모습은 아버지 아브라함 때처럼 블레셋 사람들의 강성함으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아내 리브가를 아내라고 당당히 밝히지 못하고 살아남기 위해 누이라고 속인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분명히 그의 삶에 동행할 것을 약속해주셨지만 이삭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이삭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염려와 근심 속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삭과 함께 하셨고 이삭과 리브가를 블레셋 민족들로부터 보호해주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하신대로 큰 복을 주셨다. 즉 이삭이 농사를 지었는데 그 해 따라 블레셋 사람들보다 100배의 결실을 거두었던 것이다. 두 배나 세 배라면 혹 인간의 힘으로 얻은 결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백배의 결실을 얻다보니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님에 분명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그 이후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시기를 사게 된다. 이삭이 자신들의 땅에서 잘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물을 메우고 자신들의 땅에서 떠나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삭은 이 곳 저 곳으로 정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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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는 자가 복이 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불러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실 때 함께 따라온 가족 중에 한사람이 조카 롯이었다. 이것은 롯이 일찍이 자신의 아버지를 잃고 삼촌이었던 아브라함을 많이 의지하고 살았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롯을 불쌍히 여겨 여러 면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롯은 자신의 목자와 아브라함의 목자사이에 좋은 목초지를 두고 사소한 다툼이 벌어졌을 때 아브라함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지 않고 자신이 먼저 푸른 초장이 펼쳐져 있는 요단강변의 땅을 차지하는 욕심을 부리게 된다. 이때 롯은 나름대로 자신의 삼촌이었던 아브라함보다 현명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을 기점으로 나중에는 소돔성에 정착하기에 이른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롯은 소돔성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아내와 두 딸, 이렇게 넷이서 살아가게 된다. 그 당시 소돔은 얼마나 풍요로운 땅이었는지 ‘여호와의 동산과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13:10)고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그 만큼 소돔이 가나안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사람이 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문제의 시작은 그 땅에 전쟁이 일어나 롯이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에게 포로로 끌려가게 된데서 찾을 수 있다. 이 때 아브라함이 아니었더라면 꼼짝없이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로 전락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우심과 아브라함을 통해 극적으로 포로에서 구출되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롯이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대목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여전히 죄악의 도시였던 소돔에 머물러 있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롯이 아브라함처럼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면 전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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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낫바네아 애굽에서 총리되었던 요셉에게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은 ‘사브낫바네아’ 이다. 이 이름은 애굽의 왕 ‘바로’가 붙여준 이름인데 그 뜻은 ‘세상의 구원자’라는 의미이다. 요셉은 노예의 신분에서 총리가 되기까지 어느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요셉이 그렇게 크게 사용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과 신뢰의 결과였다. 비록 그가 자신의 미래의 모습이 어떨지 정확히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했다 할지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걸음을 인도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 갈 때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꿈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느 자리에 머물든 항상 긍정적이었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결과 노예로 팔려 간지 13년의 세월이 흘러 그의 나이 30세가 되었을 때 어느덧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사람은 요셉에게 함께 했던 축복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신앙인들이 어려움과 고난 앞에 쉽게 무너진다는 사실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의 과정이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깊이 생각하기에 앞서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 한마디로 불신앙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도 개의치 않았으며 애굽에 노예로 끌려가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디발의 집에서 긍정의 마인드로 매사에 최선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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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사장인가? 하나님께서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될 때 비로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육적 이스라엘을 택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제사장나라’를 삼기 위함이었다(출19:6). ‘제사장나라’가 무얼 의미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제사장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구약에 나타난 제사장의 역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라 할 수 있다. 마치 결혼적령기에 접어든 젊은 남녀가 서로 배필을 만나지 못했을 때 둘 사이에 개입하는 사람이 중매쟁이이다. 요즘은 중매쟁이라는 말이 잘 사용되지 않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 만 해도 중매쟁이는 흔하게 사용되는 말이었고 실제로 중매쟁이를 통해서 결혼이 성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듯 중매쟁이는 남녀 사이에서 다리를 놓는 징검다리와 같은 존재였다. 그렇다고 봤을 때 제사장의 역할 역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다리를 놓는 일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나아갈 때 스스로 임의로 나아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인간은 속된 존재이기에 인간의 죄문제, 즉 더러운 것이 씻어지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제사제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때 이러한 제사(예배)를 주관하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여 세운 사람이 제사장이었다. 제사장의 주된 일은 성전(성막)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제사를 총괄하는 일이었다. 다시 말하면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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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하나님 십계명 중에 제 5계명이 부모공경에 관한 내용이다. 1-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계명이라고 했을 때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다. 그 중에 부모공경에 관한 제5계명은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계명 중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왜 살인이나 간음, 도둑질보다 순위에 있어서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관계의 출발이 부모공경으로 부터 시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사람이라면 살인이나 도둑질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혹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육신적 연약함으로 인해 한 때 이런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부모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고 공경하는 사람이라면 잘못된 죄에서 돌이키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부모에게 더 이상 근심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이것은 마치 우리 신앙인이 죄의 자리에 있다가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다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부모는 어떠한 존재이기에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렇게 중요한 위치에 두었을까? 그것은 곧 눈에 보이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요일4:20). 그렇다고 봤을 때 부모는 인생들에게 있어서 눈에 보이는 또 다른 하나님과 같은 존재인 셈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부모의 공통분모는 생명을 공급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은 부모를 통해 이 땅에 공급되는 것이다. 그 만큼 부모는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전상후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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